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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일기

후배 신학생들에게

최강 1 1,586 2015.11.04 10:49
후배 신학생들에게!

로베르또! 그리고 미겔! 잘 도착했다는 메시지 보내줘서 고맙다. 돌아가는데 만도 만 하루가 걸리는 것을 보니 우리가 정말 먼 곳에까지 와서 살고 있긴 한가보다 라는 생각을 했다. 지난 일 년 동안 익숙하지 않은 스페인어를 쓰면서 낯선 문화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느라 고생이 많았지? 이제는 꿈에도 그리는 어머니의 품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오늘 화요일 병자방문을 나가기 전에 라면 한 개를 끓이면서도 너희들 생각이 나더구나. 너희들이 여기에 있었으면 아까운 라면을 세 개나 끓였어야 하는데 이제는 한 개만 끓여도 된다는 현실이 우선은 반가웠다. 하지만 이내 그 반가움은 너희들에 대한 그리움을 덮기 위한 가면 같은 것이었다는 것을 느끼고는 피식 웃음 지었다. 어른들 말씀이 드는 것은 몰라도 나는 것은 금방 표시가 난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구나.

복사 아이들과 성당 어르신들이 너희들 소식을 물을 때마다 기쁘게 답을 드린다. 예. 내년 1월 21일에 부제서품을 받고 일 년 동안 부제로 지낸 뒤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틀림없이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우선 코앞에 닥친 부세서품을 겸손한 마음과 가난한 기도로 준비하기를 부탁한다. 성직에 나서는 설렘도 크겠지만 그 설렘은 금방 사그라지는 불꽃같은 것이고 사실 성직에 나선다는 것은 하느님 앞에 발가벗고 홀로 서는 것과 같은 두려움과 외로움이란다.

너희들 곁에서 사랑과 기도와 관심으로 항상 동행해 주실 신자 분들을 항상 겸손하고 친절한 자세로 섬기도록 해라. 살이 찌면 살이 쪘다고 걱정을 해주시고, 살이 빠지면 살이 빠졌다고 걱정해 주시는 부모님과 같은 분들이다. 하지만 신자 분들이 한 치의 여유도 두지 않고 매몰차게 돌아서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들이 우리들에게 주어진 사제성소, 선교성소에 벗어나는 언행을 할 때 신자 분들은 누구보다도 냉정하고 매몰차게 우리에게 등을 돌린다.

함께 지내는 동안 가족들, 특히 부모님들께 마음과 영혼을 다하여 효도하여라. 다른 아들들과 달리 우리는 영광스런 사제의 길에 발을 디딤과 동시에 조국과 가족과 그리운 친구들을 뒤로하고 낯설고 먼 땅으로 떠나야만 하는 존재들이다. 가족의 대소사를 함께 챙기지 못하는 것 자체가 불효이겠으나 그보다 더 큰 불효는 연세가 들어가시는 부모님을 자주 손 잡아드리지 못하고 안아드리지 못하는 것이리라. 곁에서 모실 수 있는 짧은 시간 동안 많이 안아드리고 많이 업어드려라.

사람들 앞에 있을 때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처럼 항상 친절하고 재밌고 밝은 마음으로 섬기도록 해라. 하지만 성소 앞에서는 항상 진지하고 냉정한 이성을 써야함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제 조금 있으면 유동진 신부가 이틀 전 너희들이 떠난 깜뻬체 공항에 도착한다. 하나가 떠나니 또 다른 하나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기꺼이 이곳 가난하고 위험하고 낯선 땅에서 새로운 하느님의 인연들과 함께 살아가고자 그 첫 걸음을 내딛는구나.

유 신부처럼, 로베르또와 미겔처럼 용감하고 투철한 신앙으로 어려운 선교성소의 소명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후배들이 있어서 참 행복하다. 나 혼자라면 불가능하겠지만 이렇게 서른을 갓 넘긴 젊은 나이에 이 거룩한 선교의 여정에 동행해주는 후배들이 있어서 비로소 이 못난 선배도 용기를 내고 웃으며 터벅터벅 오늘 하루를 걷는다. 너희들이 떠날 때 맛있게 먹어줬던 생갈비 구이를 오늘 도착하는 유 신부를 위해 준비하려고 한다. 물론 화려한 칼질로 한국식 갈비처럼 길게 자르고 예쁜 칼집도 넣어줘야지.

항상 하느님 안에서 기쁘고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기도한다.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들의 앞날을 축복하며 부족한 이 편지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사랑한다. 사랑이 전부다!

깜뻬체에서
빠드레 구아뽀가

* 오늘도 잊지 않고 세월호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을 위해, 철저한 진상규명을 위해 기도와 미사를 봉헌합니다. 진실과 양심까지 침몰시켜서는 안됩니다.

Comments

임정환 2016.01.27 22:54
좋은 글 감사합니다. 빠드레 구아뽀. 허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