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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봄호 -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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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외방선교회 작성일17-03-07 18:22 조회25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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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행 이 다

아무것도 아닌 내가 지금 남국의 땅에서 감히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다니 이 얼마나 가당치 않은 일인가. 그리고 또 이 가련한 이의 인생을 생각하면 얼마나 다행인가. 주님 곁을 떠나 십여 년을 방황하다 돌아와서 어찌어찌 지내다 보니 지금 여기 오세아니아의 섬나라 파푸아뉴기니에 와 있는 게 아닌가.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지만 일 년에 한 번 정도 마당(Madang)에 있는 지부에 나가서야 겨우 비릿한 소금 냄새를 맡을 수 있고, 나머지는 그냥 가도 가도 산밖에 없는 고산지대 멘디(Mendi)에서 살아간다는 것도 생각해보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면 나는 바다는 가끔 한 번씩 보아줄 때나 이쁘지 늘상 보면 마냥 지루한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부류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산은 질리지가 않는다. 물론 한국처럼 사시사철이 있어서 그 변화무쌍함을 만끽하는 재미는 없다. 늘 푸르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당연히 없다. 항상 그린 크리스마스다. 이것도 생각해보니 좀 지루해질 듯한데도 나는 마냥 좋기만 하다. 산만 좋은 것이 아니다. 사람들도 좋다. 온화하고 평화롭고 사랑스럽기 그지없어서 좋은 게 아니다. 거칠고 시끄럽고 우악스러워서 좋은 게다.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감정적인 느낌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너무 이리 재고 저리 재는 신중함보다는 마음이 쏠리는 대로 후다닥 움직이는 경박함이 어쩌면 이리도 나와 잘 맞는가. 참으로 다행이다.

처음의 낯섦이 점차 익숙함이 되다가 나중에는 타성이 된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 당최 멘디에서는 익숙할 만하면 다시 낯설게 느끼게 되어 타성에 빠질 염려는 전혀 없는 듯하다. 정말 다행이다. 참으로 징그럽게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로 인해 참을성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내가 그나마 조금이라도 참게 되었으니 이도 참으로 다행스럽지 않은가. 또 반백 년이 다 되어가는 내 인생에서 몇 번의 죽을 고비가 차가 완전히 폐차된 한국에서의 교통사고를 빼놓고 전부 이곳에서 생긴 일이 아닌가. 죽음을 직면하고 있어야 하루하루의 삶을 더 잘 살 수 있다는 말도 있기에 바로 파푸아뉴기니 멘디에서 이 소중한 체험을 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 진정 나에게는 다행이다. 덤으로 사는 생명이기에 진정 감사하고 소중히 여길 수 있게 되었다.

레이크 쿠투부(Lake Kutubu) 성당의 첫 주임 신부로 발령받아 온 것도 너무나 다행한 일이었다. 이곳에 오니 거짓말 하나 붙이지 않고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숟가락부터 밥그릇까지 전부 새로 구입해야만 했다. 까짓 사주마하고 없는 돈 있는 돈 다 끌어다가 살림을 장만했는데, 문제는 빛이었다. 교구청 신부들이 가끔 찾아와 미사를 드리고 머물던 사제관의 태양열 전지판을 내가 오기 반년 전에 도둑맞은 것이다. 교구장님의 곧 마련해 주신다는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고는 마냥 기다렸다. 매일 밤 나 홀로 촛불 잔치를 하면서, 책도 읽을 수 없고 컴퓨터도 쓸 수 없는 촛불 켜는 밤을 두 달가량 보냈다. 잠은 안 오고 희미한 촛불 아래서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자의 반 타의 반 기도와 묵상을 하며 보냈다. 다행이었다. 마흔이 넘어 오게 된 첫 본당에서의 시작이 그렇게 희미한 빛이었으니 말이다. 지금껏 이 본당에서 지내면서 온갖 진상, 갖가지 꼴을 겪으면서도 끝내 희망을 버리지 않고 버틴 희망의 근원이 바로 두 달 동안의 촛불과 함께 한 어둠의 시간이었다. 어두운 밤, 가냘픈 촛불에 근심, 걱정, 분심을 태우며 보낸 그 시간이 내게 주어져서 진실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하고 싶은 일들이 많다. 아직 해야만 할 일들이 많다.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양아치에서 양치기로의 삶의 초대가 있었고, 이에 응해서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갈 길은 멀고 해는 지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 요즘, 아직은 굴릴 수 있는 몸뚱이에 나이에 걸맞지 않은 치기어린 열망이 들끓고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다. 임께서 아직 여기 파푸아뉴기니에서 나를 써먹으려 하시기에 정말 다행이다.

 

 

파푸아뉴기니(Papua New Guinea) 지부 멘디(Mendi)교구

레이크 쿠투부(Lake Kutubu) 본당

서용범 베드로 신부

 

                                                         2017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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