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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여름호 - 心意의 용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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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외방선교회 작성일17-06-09 13:46 조회23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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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意의 용돈

황승현 아우구스티노/중국 지

 

 용돈을 자주 받습니다. 나환우들이 저에게 구겨진 지폐를 건넵니다. 받지 않으려 하지만 心意라며 억지로 주머니에 넣어줍니다. 가끔씩 수탉을 받아옵니다. 나환우들이 자신들도 잘 먹지 않는 닭을 방문 온 저에게 건넵니다. 극구 사양하지만 살아있는 닭을 心意라며 차에 넣어줍니다.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분들이 말씀하시는 ‘心意’라는 뜻을 가슴에 새겨봅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자신들을 방문하는 외국인에게 心意라는 말을 사용하며 맛있는 것을 사 먹으라며 돈을 건네는 나이든 할머니들을 눈에 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슬픔이 짙게 묻어있습니다.

어디에도 있지만 아무나 볼 수 없는 나환우들의 생활. 특히 이곳에서의 생활은 단절과 고난의 시간입니다. 깊은 산 속으로 밀려나 도시가 내뿜는 작은 소리조차도 들을 수 없는 마을에서 살아가는 이분들의 시간은 우리들의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고통스럽겠지만 내색하지 않고 썩어가는 육신의 처지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이분들에게 외국인이 건넬 수 있는 위로의 말은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그저 “다음 달에 또 올게요”가 전부입니다.

 

다리를 절단해 의족을 사용하는 할머니를 모시고 의족을 수리하러 나가는 길에서 할머니는 감사하다며 눈물을 흘립니다. 낡고 낡아 다리에 맞지 않아 삐걱거리기까지 하는 의족을 아무도 고쳐주지 않기에 제가 가기만을 기다립니다. 자신의 시간보다는 제가 시간이 나기를 기다려 낡은 의족을 고쳐야 합니다. 할머니는 손을 꼬옥 잡아주며 감사하다는 말을 계속하십니다. 누가 자신을 이렇게 대해주겠냐면서.

 

 썩어가는 발 때문에 다리 절단 수술을 받아야 하는 중년의 아주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잘라야 하지만 자르고 싶지 않은 다리. 어렵기만 했던 자신의 결정에 대한 회한의 눈물일까? 비록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발이었지만 그동안 자신을 잘 지탱해준 다리를 잘라내야 하는 아픔을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저 희미하게 짐작만 할 뿐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경험할 수도 없고 또 알 수도 없습니다. 이럴 때 제가 이분들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는 것이 너무 아플 뿐입니다. 제 다리가 문어처럼 많다면 떼어드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환우분들의 절실한 아픔을 그저 쳐다보기만 해야 하는 상처가 그분들의 처절한 외침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같이 아파하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동행하는 기사도 애써 눈을 돌려 하늘을 보며 눈물을 감추지만 돌아오는 차에서 서로 대화가 없는 날에는 서로 마음을 짐작합니다.

 

 한 달 후 다시 마을을 방문하여 중년의 아주머니를 찾았을 때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아주머니는 또다시 눈물을 흘리며 제게 안깁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 그리고는 돌아서는 저에게 구겨진 지폐 한 장을 건넵니다. 찾아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이런 분들이 어느 날 갑자기 보이지 않는 경우가 생깁니다. 장례라기보다는 그저 태워서 없애는 과정을 거치는 이분들의 장례는 순식간에 끝이 납니다. 마을 사람들 몇몇이서 장례를 치릅니다. 애도의 꽃도 없고 영정사진도 없습니다. 울긋불긋한 만장도 없고 조문객도 없습니다. 가장 힘들게 이 세상을 살아온 분들이지만 추모의 비행도 없고 길을 트라는 경찰의 에스코트도 없습니다. 아픈 시간을 질기게도 살아온 인생 여정을 마치는 순간에도 이분들은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장작 위에 천으로 휘감아 올려진 이분들의 시신은 죽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딱딱 소리를 내면서 타들어 갑니다. 화장을 돕는 이들도 무표정한 얼굴입니다. 자신들도 역시 그렇게 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환우 분들은 어쩌면 이승이 너무나도 아픈 곳이었기에 하루라도 더 빨리 이곳에서 떠나기를 간절히 소망했을지도 모릅니다. 더 나은 세상이 있다면 천금을 주고라도 그리로 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분들이 저를 반길 때 저는 그 마음을 느낍니다. 아픔이 얼마나 승화되어야 그렇게 기뻐할 수 있을까?

 

 지난 1년 사이 열 분이 넘는 환우 분들이 그렇게 세상을 홀연히 떠났습니다. 당연히 제가 받을 心意의 용돈도 줄어들었습니다. 꼬깃꼬깃한 50원짜리 100원짜리 지폐들이 그리워집니다. 손가락이 없어 뭉텅이 생강 손으로 주시는 할머니들의 용돈이 그립습니다. 더 받고 싶은데 갈수록 액수는 작아집니다. 다행일까요? 할머니들의 눈물이 때론 그립습니다. 눈물을 보이는 할머니들을 안아주며 울지 말라고 울면 더 아프다고 말하며 달래는 것도 갈수록 줄어들고 있습니다.

 

 저는 빨리 이 소임을 접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제가 눈물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이분들이 빨리 돌아가셔야만 이 땅에서의 처절한 아픔이 사라지고 저희처럼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필요치 않기 때문입니다. 心意의 용돈이 줄어드는 한이 있어도 환우 촌이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마을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동행해주신 분께 물어봅니다. 언제까지 우리가 이 일을 해야 하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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