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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푸아뉴기니


파푸아뉴기니 > 선교지 소개

 


1. 파푸아뉴기니 선교 역사

18세기 초, Rabaul 지역에 도착한 네덜란드 ‘말씀의 선교수도회(신언회:SVD)' 회원들에 의해 미지의 세계 파푸아(Papua)섬과 뉴기니(New Guinea)섬의 선교가 시작되었다. 파푸아라는 말은 “머리털이 꼬불꼬불한 사람들”이란 뜻이고, 뉴기니라는 말은 아프리카의 기니아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네덜란드 식민지였다가 독일의 식민지로 넘어갔고, 그 후 2차 대전 중에는 일본의 점령지로 되었고 2차 대전 후에는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의 식민지로 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식민지였던 파푸아와 뉴기니는 1975년 파푸아뉴기니(Papua New Guinea)로 국명을 만들고 하나의 국가로 독립하게 되었다.

파푸아뉴기니는 남위 5도에 위치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섬으로 열대우림기후에 속하며, 800여 개의 부족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들의 공식 언어는 영어와 영어에서 변형된 피진어(Pidgin English)이다.

현재 선교사들은 주민들과 대화하고 미사를 할 때 피진어를 주로 사용하고 있고, 지역에 따라 아직 부족어로 미사를 하는 곳(Mendi교구)도 있다.
화폐단위는 키나(Kina-조개껍질이라는 뜻)를 사용하고 있고 원시문화에서 조개껍질을 돈 대신 사용했다는 역사를 안다면 왜 화폐단위가 키나(Kina)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896년 마당(Madang)의 보기아(Bogia)지역에 있는 모눔보(Monumbo)라는 마을에 첫 선교사들이 닻을 내렸고, 지형상 선교하기 수월한 알렉시스하펜(Alexishafen)으로 둥지를 옮겨 선교본부를 건설하였다. 현재 한국외방선교회가 파견되어 있는 마당대교구는 1980년 당시 교구장이었던 Leo Arkfeld 대주교의 선교사 파견요청을 받고 1981년 한국교회 역사상 최초의 선교사 네 명(김동기, 방상복, 김진영, 연제식)을 파견하게 되었고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선교사를 파견하고 있다.


2003년 남부산악 지대인 멘디(Mendi)교구에서 선교사 파견 요청이 들어와 2004년 8월 말 마당대교구에서 선교하던 두 명의 회원이 그곳으로 파견하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현재 파푸아뉴기니에는 마당대교구와 멘디교구 두 개의 교구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마당대교구는 일 년이 건기(5월-11월)와 우기(12월-4월)로 나누어지는 전형적인 열대기후의 지역이다. 이곳 시내에는 한국외방선교회 파푸아뉴기니 지부가 있고, 북쪽으로 향한 해안 도로를 따라 몇 개의 본당에서 사목하고 있다.

멘디교구는 마당 지역과는 달리 한국의 가을 날씨와 비슷한 고산지대이다.


2. 선교지의 이모저모

파푸아뉴기니는 오세아니아대륙에 속하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섬(제일 큰 섬은 그린랜드)이라고 말하는 뉴기니섬의 동반부에 위치한 나라이다. 이 나라는 적도를 약간 넘어 남위 6도, 동경 147도에 위치하고 있다. 파푸아뉴기니는 1885년 독일(북쪽지역-뉴기니지역-마당(Madang)대교구)과 영국(남쪽지역-파푸아지역-멘디Mendi교구)에 의해 통치되었다. 그 후 1902년 북쪽지역이 호주에 의해서 점령되어 통치를 받았고 독립할 때까지 호주의 지배를 받았었다. 1975년 9월 16일 호주로부터 독립하여 영연방(Commonwealth) 중의 하나가 되었다. 지금은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정치적인 독립은 이루어졌으나 여전히 간섭을 받고 있는 증거가 포착된다. 그 예로 2003년경부터 호주의 경찰병력 700여명을 파푸아뉴기니 국내 치안을 강화하기 위해 투입하려는 계획이 진행되었었고, 2004년에 실제로 몇 명이 들어왔으나 국회의원 한 명의 강한 반발로 철수하는 우스운 일이 있었다.

또한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아직까지 호주의 속국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호주의 자원약탈은 심각한 상태라고 본다. 일례를 들면 파푸아뉴기니의 금, 은 동, 천연가스 그리고 원유 등을 채취하는 회사들은 겉으로는 현지인들을 대표로 내세우지만 실질적인 사주는 호주인이다. 이렇게 착취해간 자원을 호주는 호주지원단(AusAid)이라는 이름을 빌어 파푸아뉴기니에 도로, 다리, 물탱크, 학교 등을 지어 되돌려주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원조가 착취해간 것에 비해 너무도 미미함에도 불구하고 일반 국민들은 호주에 대해서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파푸아뉴기니는 동반부의 비스마르크제도와 보우겐빌(Bougainville)섬 등의 열대 제도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나라의 수도는 포트모르스비(Port Moresby)이다. 흥미로운 점은 수도인 포트모르스비는 한 나라의 수도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그 지역 자체만 동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즉, 다른 지역에서 수도에 도달하는 길은 오직 비행기를 이용한 항로와 배를 이용한 해로뿐이라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수도에 가려면 비행기 표를 구할 수 있는 사람만이 갈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포트모르스비의 생활수준과 타지역의 생활 준은 정확한 통계는 확인한 바가 없지만 대충 보아도 엄청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고립된 지역인 포트모르스비가 수도가 된 이유는 아마도 호주에서 가장 가까운 지역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지금은 파푸아뉴기니의 산업도시인 레이(Lae)에서 포트모르시비까지 육로를 만들겠다는 야심찬 계획이 세워지고 있으나 그 결과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싶지 않다. 이러한 파푸아뉴기니는 동쪽으로는 태평양과 솔로몬해, 서쪽으로는 인도네시아, 남쪽으로는 산호해(Coral Sea)와 토러스해(Torres Sea), 그리고 북쪽으로는 태평양을 안고 있다.

국토의 넓이는 남북한 합친 한반도의 두 배(462,840㎢)가량 된다. 남태평양과 솔로몬해, 산호해 등을 안고 있는 이 나라의 총 해안선은 5,152km에 달한다. 제일 낮은 지역(해발)은 태평양에 근거를 두고 있어서 0m이고, 제일 높은 지역(해발)은 윌헬름(Mt. Wilhelm)산인 4,509m이다. 이 윌헬름 산은 마당대교구와 근접해있는 심부(Shimbu)지역의 쿤디아와교구에 있는 산으로 과거에 한국 신부들이 잠시 활동했던 마당대교구의 분디(Bundi)본당에서 하루 정도 걸어서 도달할 수 있는 거리에 있다.

총인구는 2007년 인구조사 현재 5,931,769명이다.


(1) 역사

고고학적 증거가 제시하듯이 인류가 파푸아뉴기니에 도착한 것은 최소한 6 만 년 전이다. 아마도 빙하기 때 바다가 얕아지고 각 대륙 간의 거리가 좁아졌을 때 남동아시아 쪽에서 바다를 통해 그곳에 도착했다고 추정한다. 최초로 도착한 사람들은 수렵과 채취를 했으며, 초기 증거로 살펴볼 때 사람들은 식량을 마련하기 위해 삼림지대를 활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동시에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와 같이 농경지를 만들어 농사를 지었다고 생각된다. 초기의 농작물은 사탕수수, 바나나, 얌 그리고 타로 등 토착 작물이었으며, 사고(Sago)와 판다누스(pandanus) 등은 현지 삼림에서 얻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의 주요 산물인 고구마와 돼지는 나중에 도착되었으며, 조개와 물고기는 해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주식으로 이미 오래 전부터 이용되고 있었다.
유럽의 백인들이 처음 그 곳에 왔을 때는 뉴기니와 그 근방의 섬에서 살던 원주민들은 뼈, 나무 그리고 석기에 의존해 살고 있었으며, 이를 이용해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들은 해안을 따라 토기, 장식을 위한 조개껍질, 식량 등 삼림지역의 생산물을 조개와 그 밖의 다른 바다의 생산물과 물물교환을 하고 있었다. 뉴기니를 발견한 최초의 유럽인들은 16세기 초에 남태평양 지대를 조사하기 위해 항해했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탐험대였다.

1526년부터 27년에 포르투갈돈 조르지 드 메네세스(Don Jorge De Meneses)는 항해 중 사고로 인해 본섬에 도착했고, 그 섬을 인도네시아어족인 말레이어로 ‘고수머리’라는 뜻인 파푸아(Papua)라고 명명했다. 뉴기니지역은 1545년 스페인의 이니고 오르티쯔 데 레떼스(Inigo Ortiz de Retes)에 의해서 발견되었는데, 이 지역이 아프리카 기니지역과 흡사하다고 생각해서 뉴기니라고 명명되었다. 유럽의 해양탐험가들에 의해서 그 이후 170여년동안 탐험이 되었지만 19세기가 될까지 이 지역에 대해 알려진 것은 별로 많지가 않았다.

1) 뉴기니
유럽에서 코코넛 기름에 대한 수요가 많아지자 태평양의 가장 큰 무역회사인 곧프로이 함브르그(Godeffroy's of Hamburg)는 뉴기니에서 코프라 무역을 시작한다. 1884년 독일은 공식적으로 섬의 북동쪽을 차지하고 회사의 지부를 설립한다. 1899년 독일제국은 이 지역을 통치하기 시작하고, 후대에 알려진 대로 독일뉴기니(German New Guinea)로 명명한다. 1914년 오스트레일리아 군인들이 독일뉴기니를 점령하고 1921년 까지 오스트레일리아 군인의 통치를 받는다. 1920년 오스트레일리아를 대신하여 영국정부는 국제연맹으로부터 위임통치권을 얻어낸다. 이 위임통치령은 1941년 일본제국의 점령 때까지 계속된다. 1945년 일본의 항복 이후, 파푸아와 뉴기니의 통치권이 회복된다.

2) 파푸아
1884년 11월 6일 파푸아 남부 해안과 인접한 섬들이 영국보호령으로 선포되었다. 이 보호령은 1888년 9월 4일 영국 뉴기니라고 명명된다. 이 지역은 1902년 오스트레일리아의 통치를 받는다. 1905년 파푸아 지역은 영국 뉴기니로 공식적으로 선포되고 1906년부터 공식적으로 오스트레일리아 정부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파푸아는 1941년 섬들의 북쪽지역을 일본에게 점령당하기 전까지 오스트레일리아의 지배 아래 있게 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수도 포트모르스비가 멕아더 장군의 군사본부로 사용되었으며 일본의 항복 후 45년부터 46년 동안은 뉴기니와 함께 통치를 받게 된다.

3) 전후의 발전
파푸아와 뉴기니는 1949년 “파푸아와 뉴기니 지역”이라는 공식적인 이름 아래 오스트레일리아의 통치를 받는다. 이 나라는 1951년 입법부, 사법기구, 공무원 조직과 지방정부의 체계를 형성한다. 1963년에는 입법부가 국회로 대체되고, 1972년에는 파푸아뉴기니로 이름을 바꾼다.

1972년 선거결과 자주적 정부로 만들겠다는 의장 마이클 소마레(Michael Somare)에 의해 행정부가 구성되며 독립할 준비를 하게 된다. 1973년 12월 파푸아뉴기니는 자주적 정부가 되었으며, 1975년 9월 16일 독립을 성취한다. 1977년 총선을 통해 팡구당(Pangu Party)의 당수 마이클 소마레가 수상으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그는 1980년 투표를 통한 불신임으로 실각하게 되었고, 줄리우스 챵(Julius Chang)이 내각의 우두머리로써 수상이 된다. 1982년 총선을 통하여 팡구당이 다시 의석수를 확보하고, 의회는 소마레를 다시 수상으로 지명한다. 그러나 1985년 다시 불신임으로 소마레 정부는 실각하고, 의회의 대다수는 다섯 개 연합당의 총수인 파이아스 윙티(Paias Wingti)를 수상으로 지명한다.

연합당의 당수인 윙티는 1987년 7월의 선거에서 승리하게 된다. 1988년 7월 윙티는 불신임으로 퇴진하고 바로 몇 주 전 소마레를 대신하여 팡구당의 당수가 되었던 랍비 나물리우(Rabbie Namuliu)에게 권력이 넘어간다. 1992년 파이아스 윙티가 수상으로 선출되었으나 1994년 불신임투표로 줄리우스 챵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1997년 총선에서 빌 스케이트(Bill Skate)가 수상이 되지만 1999년 불신임 투표로 메케레 모라우타(Mekere Morauta)에게 권력이 넘어간다. 2002년 총선에 의해 마이클 소마레가 다시 수상으로 돌아오고, 그가 이끄는 내셔날 얼라이언스 당(National Alliance Party-국가연합당)이 2007년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수상으로 남게 되어 영연방(Commonwealth) 안에서 최장기 통치자로 기록된다. 소마레는 2008년 3월 16일 그의 정치 인생 40주년을 기념하게 된다.

이러한 반전들과 끊임없는 수상직에 대한 승계는 파푸아뉴기니의 국내 정치적 특성을 만들어 내었다. 1988년부터 2002년까지 이 나라는 많은 수상을 가지게 되었다. 너무 많은 정당의 난립, 정부의 연합 책략, 정치적 철새들(shifting party loyalties), 계속되는 수상에 대한 불신임의 발의는 정치적 발전에 불안정한 기류를 초래했다. 독립 후 초기 27년 동안 사용되었던 최대득표자가 승리하는 투표방식(a first past the post electoral system)의 결과 많은 국회의원이 각 지역구 투표자의 15%도 안 되는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제어하기 힘든 당리당략과 15%의 낮은 지지도를 받은 현직 의원들로 구성된 의회로 인하여 강한 정치력을 지닌 당의 발전이나 안정된 국가 지도력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2003년부터 소개된 선택투표권(the limited preferential voting)과 정치적 당에 부과된 조직적인 법은 정치적 안정성을 강화시키고 있다.

2007년 총선으로 인하여 66명의 국회의원들이 그들의 자리를 잃었다. 정부는 여러 당들의 연합에 의해서 구성되었고, 내셔날 얼라이언스당(the National Alliance Party)의 당수인 마이클 소마레가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정부가 독립 이래 처음으로 5년간의 임기를 마치기를 희망해 본다.


(2) 자연환경


1) 지형
뉴기니 섬은 파푸아뉴기니 국토의 약 85%로 차지하고 있다. 820km의 국경을 인도네시아와 접하고 있는 파푸아뉴기는 뉴기니섬의 서쪽지대에는 인도네시아령 이란자이야와,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하려고 투쟁 중인 서파푸아가 자리 잡고 있다. 서파푸아는 사용하는 말도 파푸아뉴기니와 약간 차이가 있을 뿐 비슷한 피진어를 사용하고 있고, 인종도 파푸아뉴기니의 고산지대(멘디교구) 사람들과 대동소이한 종족이다. 파푸아뉴기니의 문제점 중에 하나인 불법무기 거래 -특별히 멘디교구를 포함한 고산지대는-는 주로 인도네시아의 이란자이야를 통해 밀수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인도네시아인들이 불법으로 국경을 넘어 파푸아뉴기니에 들어와 조업도 하고 불법거주를 해서 많은 문제점들을 가져오고 있는 현실이다. 지형은 저지대의 습지평야와 섬의 동부

에서 서부의 인도네시아까지 펼쳐진 높은 산으로 되어 있으며, 해발 1,500-3,000m 지역에 넓은 골짜기가 자리 잡고 있다. 보우겐빌, 뉴아일랜드, 뉴브리튼과 같이 외곽의 큰 섬들은 낮은 산호초로 둘러싸인 높은 화산지형이다. 중앙 고원지대 북쪽에 있는 저지대에는 본도의 중요한 2개 강 중 하나인 세픽강이 흐른다. 이 강은 동쪽으로 흘러 비스마르크 해로 흘러들어간다. 플라이 강은 남부 습지와 평원을 지나 동쪽 파푸아 만(산호해)으로 흐른다.

2) 기후

파푸아뉴기니는 열대지역권에 놓여 있으며, 기후는 몬순 기후이다. 기온은 저지대와 해안가에서 평균 27℃로 비교적 높고, 고산지대에서는 16℃ 정도이다.
실제로 파푸아뉴기니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엘리뇨 현상의 영향을 느낄 수 있었는데, 1996년에는 우기에 비가 오지 않아 가뭄으로 고통을 받았었다고 한다. 이때는 4계월가량 비가 오지 않아서 모든 학교가 휴교를 했고, 현지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신부들도 고생이 많았다고 전해 들었다. 그리고 지구의 온난화 현상으로 기온이 많이 상승하는데, 그 좋은 예가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바나나가 열리지 않던 고산지대가 기온이 올라가면서 바나나가 열리고 있다. 물론 해안처럼 종류가 많고, 맛있는 바나나는 아니지만, 그래도 바나나가 열릴 때 비닐이나 종이봉투로 잘 싸서 관리를 하면 먹을 만한 바나나를 수확할 수 있다.

12-3월에는 북서계절풍이 불어 비가 많이 오고(우기), 5-10월에는 남서 계절풍이 불어 건조하고 선선한 시기(건기)가 된다. 강우량은 보통 남부 해안지역을 제외한 전 지역이 1,500mm를 넘는다. 흔히 그곳에서는 11월-5월까지 우기라고 하고, 6월-10월까지는 건기라고 한다. 그러나 우기라고 해서 계속적으로 비가 오는 것이 아니라 강우량이 많다는 의미이고, 건기라고 해서 완전히 사막처럼 비가 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비가 적게 오고 아침저녁으로 선선하며 파란 태평양의 바다를 만끽할 수 있는 시기라고 생각하면 된다. 성탄(12월)과 부활(4월)은 위에서 보듯이 우기에 속하기 때문에 그곳에서 선교하는 신부들이 밀림 속에 위치한 공소를 방문하는 시기와 맞물려져서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비와 함께 공소방문을 하게 된다. 비가 많이 오게 되면 강물이 범람하여 공소방문 일정에 차질을 가져오기도 하고, 밀림의 길이 없어지든지 혹은 수렁으로 변해서 공소방문에 어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3) 기타
파푸아뉴기니 국토의 70%이상이 빽빽한 열대다우림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여러 나라에서 목재를 채취하기 위해 경쟁을 벌이고 있으며, 무분별한 벌목으로 세계의 NGO그룹들이 원시림의 보호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지역이다. 이곳의 토양은 전체적으로 얕은 층을 이루고 배수가 잘 되며 척박한 편이다. 그러나 비옥한 화산토와 충적토가 저지대와 외곽 섬에서 약간 발견된다.

저지대의 다우림이 주요 식생지이다. 또한 해안가의 홍수림, 저지대의 초원, 소택지 등의 식생지가 있다. 동물군은 오스트레일리아와 매우 유사한데, 많은 열대성 조류뿐만 아니라 왈라비 및 몇 종의 작은 원숭이 종류인 쿠스쿠스(Cuscus) 등이 있다. 또한 70여종의 무독성 뱀이 서식하고 있다.

경작지에 대해서 살펴보면 국토의 0.49%만 경작이 가능하다고 보고된다. 이 0.46% 라는 숫자는 땅은 넓은데 인구의 밀도가 높지 않기 때문에 많은 농토가 필요하지 않은 현지의 여건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파푸아뉴기니는 주식이 고구마와 같은 종류이기 때문에 농사일이 그다지 수월치는 않다. 하지만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일도 아니기 때문에, 눈앞에 펼쳐져 있는 넓은 땅의 일부를 경작지로 개간하여 농사를 지으면, 특별한 자연재해가 아니고서는 굶어 죽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된다.

우리의 시각에서 봐서 전국토의 0.46%의 경작지가 작은 것일 뿐 이지 그들에게는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 경작지의 절반 지역에서 얌(Yam), 따로(Taro), 콩콩(Kongkong), 고구마 등의 근채작물이 재배되고 이러한 근채작물이 주식이라고 할 수 있다. 고산지대는 우리나라의 강원도 지역과 비슷한 여건이어서 배추, 무, 양배추, 감자 등 소위 ‘돈이 되는 작물(cash crops)'을 재배하여 주로 광산이나 유전 지역에서 일하고 있는 호주 계열의 기업에 납품함으로써 부자가 된 사람들도 조금 있다. 또한 기후와 일조량이 질 좋은 커피의 생산을 가능하게 하여 주민들에게 약간의 도움을 제공하고 있으나, 전 세계의 커피농사가 다 그렇듯이 실제 커피를 경작하는 농민에게는 큰 이득이 돌아가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나무에서 바로 수확한 커피 원두의 껍질을 제거하고, 물에 여러 번 씻고, 햇볕에 잘 말린 상급 커피원두의 가격이 1kg당 우리나라 돈으로 300원 안팎에서 거래되고 있는 실정이다.

파푸아뉴기니에서 생산되는 광물에는 보우겐빌 섬의 구리, 고산지대인 소게라(Sogera)의 금, 마당대교구의 그룸보까리(Grumbokari) 지역의 니켈. 카드늄 광산이있다. 그리고 멘디교구 지역의 많은 곳에서 원유와 천연가스 등을 채취하기 위한 유전지대가 계속 계발되고 있다. 문제는 풍부한 지하자원을 가진 나라이지만 많은 부분을 호주에게 착취당하고, 그나마 얼마 되지 않는 수익은 부패한 정부 관리들에 의해서 없어지므로 일반 국민들은 보건, 위생, 교육 분야 등을 포함한 기본적인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3) 국민


1) 인구
멜라네시안(Melanesian)인종으로 구성된 인구 670만(2007년 인구조사)인 파푸아뉴기니의 토착민들은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종족을 이루고 있다. 파푸아뉴기니는 불과 몇 백 명으로 구성된 수천 개의 공동체들로 구성되어있다. 그들은 언어, 풍속 그리고 전통에 의해 나누어지며, 또한 수 천 년 동안에 걸친 이웃 종족들과의 크고 작은 규모의 부족 전쟁으로 살아가고 있다. 오늘날에 와서는 도시지역으로 흘러 들어오는 현대무기와 타 지역에서 온 이주자들은 치안의 부재를 확대하고 있는 요인이 되고 있다. 특히 고산지대는 험난한 산악지형에 의해 고립된 종족들이 있으며 이들은 아직도 외부 세계와 접촉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몇 몇 종족들은 최근까지도 불과 몇 킬로미터 밖에 떨어지지 않은 이웃 종족들을 모르고 살고 있다.
이들의 평균연령은 21.5세(남:21.6세/여:21.4세)로서 아주 젊은 연령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낮은 평균연령은 높은 유아사망율과 짧은 수명으로 인한 결과이다. 저항력이 약한 유아들과 노인들은 질병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병에 걸리면 쉽게 목숨을 잃는다. 파푸아뉴기니의 의료체계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영향으로 병원비와 약값을 정부에서 보조하는 체계로서, 외관상으로는 아주 좋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정부의 부패로 인하여 의약품의 부족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우리나라의 간호보조사들에 해당하는 의료인들이 해마다 많이 배출되지만 이들 또한 사명의식의 부족으로 일을 잘 안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가톨릭교회에서 운영하는 병원들은 선교사 수녀들의 감시 감독 아래 비교적 원활하게 운영되고 있으며 의약품도 외국의 지원으로 넉넉하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운영되고 있다.

이들의 연령대별 통계는 아래와 같다.
0세-14세 : 37.3%(남:1,124,174명/여:1,086,478명)
15세-64세: 58.7%(남:1,791,342명/여:1,690,089명)
65세 이상 : 4%(남:111,023명/여:128,663명)

인구증가비율은 3.1%로 제법 높은 편에 속한다. 1998년의 통계가 인구수 500만(이 또한 정확한 통계라고 할 수는 없다)이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10년 만에 100-120만이 증가했다. 2007년 인구조사 이후 정부에서는 높은 인구 증가율로 인해서 걱정의 목소리를 높이면서 피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정부의 태도는 과거 우리나라의 인구정책과 유사한 이유가 아닐까 생각된다. 즉, 오스트레일리아의 영향으로 많지도 않은 인구를 많다고 선전하면서 가족계획을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넓은 국토와 풍부한 지하자원으로 구성된 파푸아뉴기니가 살아갈 방법은 인구의 증가로 스스로의 나라를 운영할 능력을 기르는 것이 더욱 바람직할 것이다.

- 출생율: 28.14 출생/1,000명
- 사망율: 6.96 사망/1,000명
- 성별: 1,05 남/여 출생
15세 미만 : 1.03 남/여
15세-64세: 1.06 남/여
65세 이상 : 0.86 남/여
-유아사망율: 전체: 46.67 사망/1,000 출생
남: 50.68 사망/1,000 출생
여: 42.47 사망/1,000 출생
- 예상 수명: 전체: 66세
남: 63.76세
여: 68.35세
- 출산률: 3.71 명/한명의 여자

인구의 1%가 외국인들인데, 외국인의 절반이 오스트레일리아인이며, 그밖에 중국인과 영국인, 뉴질랜드인, 필리핀인, 인도인 그리고 미국인들이고, 그들의 대부분이 선교사들이다. 1975년 독립 이래로 약 900명의 외국인들이 파푸아뉴기니로 귀화하였다.

파푸아뉴기니에서 가장 흔한 질병은 이질설사, A형 간염, 티푸스열, 말라리아, 폐렴 등이다. 이 가운데 첫 번째 사망요인은 폐렴이다. 위의 병명을 살펴보면 대부분 위생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별히 마실 물이 깨끗하지 않아서 생기는 이질과 티푸스, 또한 지저분한 물웅덩이로 인한 모기의 번식에서 나타나는 말라리아 등을 보면서 이들이 위생에 조금 더 신경을 쓰면 충분히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안타까움을 가진다.

2) 언어
파푸아뉴기니의 중요한 언어는 피진어(멜라네시안 피진-Melanesian Pidgin)이다.
‘피진’이란 말의 어원은 영어의 비즈니스(business)에서 왔다고 한다. 과거 중국의 상인들이 파푸아뉴기니 사람들과 상거래를 하기 위하여 영어를 변형시켜 만든 엉터리 영어(Btoken English)라고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이 피진어 속에는 라틴어, 독일어, 프랑스어의 영향도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교회 용어는 많은 경우 라틴어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 피진어의 본고장은 뉴기니지역의 해안과 섬(라바울-Rabaul)들인데 외국의 상인들, 특히 중국 상인들을 쉽게 접할 수 있었던 지역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상인들뿐만 아니라 선교사들도 이 지역에 처음으로 발을 내딛었을 것이기 때문에 상인들과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피진어가 발전하고 보급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일례로 그곳에 파견되었던 선교사의 증언에 따르면 처음 파푸아뉴기니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일했던 피진어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마당(Madang)대교구에서 배웠던 피진어와 7년 후 본회의 타 교구 진출과 함께 옮겨간 산악지대인 멘디(Mendi)교구로 가서 들은 피진어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마당지역은 1896년경부터 독일 선교사들이 들어와 활동했던 지역이기 때문에 피진어 속에 라틴어와 독일어의 잔재를 찾아 볼 수 있었는데, 멘디지역은 1955년 미국의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들어와 가톨릭교회를 시작했던 관계로 이 지역에서 사용되는 피진어는 영어에서 파생된 단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 지금도 멘디교구에서는 교구 사목지침서와 소식지를 받아보면 영어단어를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하는 영어도 아니고 피진어도 아닌 엉터리 말을 사용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있다.

(예1) 한국어: 마리아 - 마당지역 피진어: 마리아(Maria) - 멘디지역 피진어: 메리(Mary)
(예2) 한국어: 교회 - 마당지역 피진어: 시오스(Sios) - 멘디지역 피진어: 처치(Church)

피진어 외에 파푸아뉴기니 사람들이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는 영어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수업을 영어로 하기 때문에 그들이 영어를 잘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교실만 나서면 피진어나 부족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유창한 영어를 하려면 대학 교육을 받아야 한다. 또 실제 통계상에도 영어의 사용자가 1-2%의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제시되어 있다. 또한 수도인 포트 모르스비를 중심으로 한 파푸아지역에서는 모투(Motu)어가 사용된다.

파푸아뉴기니의 문맹률은 ‘15세 이상의 사람으로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으로 기준하여 전체 인구의 57.3%(남자 63.4%, 여자 50.9%)이다. 낮은 문맹률의 원인으로는 마당대교구가 속한 대도시와 멘디교구가 속한 해안지방의 주민들로 인해서 통계 결과가 그렇게 나왔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실제로 마당대교구에서 사목할 때는 글을 못 읽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는데, 멘디교구에서는 글을 읽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파푸아뉴기니는 인류학의 보물 창고이며, 특별히 언어인류학의 보고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전 세계 언어의 십분의 일(1/10)인 820여 개의 언어가 파푸아뉴기니 안에서 사용되기 때문이다. 수천 개에 이르는 각 종족들의 차이점은 각자의 언어 속에서 찾을 수 있다. 파푸아뉴기니에서 사용되는 820개의 언어 가운데 350개 내지 450개 만에 서로 연관성을 가지고 있고 나머지 언어들은 서로 간에 전혀 연관성이 없다고 한다. 대부분의 각각의 토착어들은 몇 백 명에서부터 몇 천 명 정도의 사람들에 의해서만 사용되고 있으며, 비교적 많은 종족에 의해서 사용된다는 엥가(Enga)지역의 앵가어도 13만 명만이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토착어들은 아주 복잡한 문법체계를 가지고 있어서 배우기가 쉽지 않다. 본회 사제가 멘디의 마가리마(Margarima)본당에서는 사목할 때 본당이 큰 관계로 두 가지 부족어를 사용하는 19개 부족과 함께 살았었는데, 말이 어려워 Huli어만 배워서 사목을 했었다. 그나마 미사는 훌리어로 하고 강론은 교리교사들의 통역을 통해서 전달했었다. 교리교사들이 비록 부족하지만 피진어를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신자들과의 의사소통은 어렵지가 않았다.

3) 도시

대도시와 같은 인구집중 지역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인구 밀도는 낮은 편이다. 파푸아뉴기니의 서부고산지대의 경우 킬로미터당 평균 한 사람이 살며, 심부(Chimbu)지역은 킬로미터당 평균 20명이 살고 있다. 땅이 기름져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지역도 킬로미터당 200 정도 사는 것으로 집계된다. 도시화 되어가는 포트 모르스비와 다른 주요 도시도 최근 몇 년 전부터 도시로 꼴을 이루어 가고 있다. 1990년대부터 가속화되어가는 도시화는 빈민가를 형성하고, 윤리적 타락과 실업자의 증가, 공중복지시설의 부족함에 대한 압박과 특히 후천성 면역결핍증(HIV)의 확산과 강력범죄의 증가 등의 사회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다.

4) 친족관계
매우 광범위한 문화들임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파푸아뉴기니의 사회적 구조는 생계를 위한 관습, 직접적 가족단위를 넘어서 확장되는 의무들을 지닌 친족의 결합에 대한 인식, 일반적으로 상속이나 신분 보다는 오히려 인위적 요구에 의해 강조되는 평등한 친족관계, 공동체에 의해 관리되는 토지에 대한 사람들의 강한 집착과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다. 전통적인 공동체들은 토지를 팔 때 그 소유권의 영구적인 이전을 인정하지 않는다. 어떤 문화에서는 여자 계열을 통해서 상속되는 토지와 다른 재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여자들은 하위계열로 간주되고 취급된다. 성차별은 고유한 것이다. 성행위에 대한 방법이나 횟수는 결코 공개적으로 이야기 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특히 시골지역) HIV의 빠른 확산 속도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 대부분의 파푸아뉴기니 사람들은 부족의 삶에 근간이 되는 전통적 사회 구조에 여전히 강하게 결합되어 있다.


(4) 사회·경제


파푸아뉴기니는 풍부한 천연자원을 선사받았지만 거친 지형으로 인하여, 그리고 국가 발전을 위해 필요한 사회 기반 설비를 이루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기 때문에, 기반 시설이 미비한 파푸아뉴기니는 가지고 있는 풍요로운 천연자원에 비해 그것이 국가 경제에 미친 영향은 미미했다. 그래서 농업이 전체인구 85%의 주요 생계수단이다. 구리, 금, 원유 등을 포함한 풍부한 지하자원은 수출을 통한 국가수익의 2/3을 차지한다. 하지만 현 수상인 마이클 소마레 정부는 이러한 국가의 자원과 에너지를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대부분 소비했었다.
정부는 또한 국가 예산을 안정시키기 위해 지출을 강력하게 조절하였으나, 그러한 조절 기능 조차도 2006년과 2007년 이 년 동안 총선을 치루기 위해 변형되고, 완화되어 예산이 지출되었었다. 2007년 5월 총선을 치루기 위해 파푸아뉴기니 정부는 2006년 5월부터 고산지대, 특히 본회 사제가 사목했던 남부고산지대(멘디교구)에 비상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파견했었다. 파견된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자금은 결국 국민들의 복지와 경제 발전을 위해 투자해야 할 몫이 전용되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중앙 정부에서는 총선을 맞이하여 멘디지역의 주민들을 달래기 위해 아시아은행으로부터 거금을 얻어 와서(차관이 아니라) 멘디 읍내를 시작하여 마가리마(Margarima)를 거쳐 따리(Tari)로 이어지는 도로의 아스팔트 포장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 공사는 자금의 낭비와 지방 정부의 부패로 실패하고 말았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당시 도로공사를 맡았던 회사가 이탈리아에 본사를 둔 필리핀 지사였는데, 그 필리핀 지사에서 파견된 감독관을 포함한 다섯 명의 임원이 한국사람이었다고 한다. 임원이 한국인인 덕분에 도로 공사에 사용되었던 중장비가 대부분 한국산이었다. 도로 공사가 실패로 치닫는 것을 피부로 느낄 즈음부터는 길을 다닐 때마다 눈에 보이는 한국산 장비 때문에 얼굴이 붉어졌던 기억이 있다. 또한 중앙정부는 집권당의 후보를 선출시키기 위해 많은 자금을 풀었고, 대부분의 부패한 정부가 있는 국가가 그렇듯이 이러한 자금의 출처는 명확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2007년 어렵사리 총선을 마친 파푸아뉴기니 정부는 외국 투자자들의 투자에 대한 확신을 다시 얻고, 국영기업에 대한 신뢰성을 회복하고, 부실 국영기업의 민영화에 따른 경제적 효과의 증진시키고, 전 식민지 통치국이었던 오스트레일리아와의 균형 있는 관계를 형성하는 것 등을 포함한 여러 가지 도전들에 직면하고 있다. 또한 고질적인 치안부재에 따르는 범죄와 불안감, 터무니없이 과다하고 근거 없는 보상을 받아내기 위한 토지 소유권에 관계된 상습적이고 비윤리적인 소송 문제도 항상 어려움으로 다가온다. 오스트레일리아는 2007년과 2008년 이 년 동안 파푸아뉴기니 국가예산의 20%에 해당되는 3억 달러의 지원을 하고 있으나 이 또한 지출되는 용도가 투명하지 않다. 2008년 현재 1인당 GDP는 $2,200로 세계 183위이다.

1) 농산물
85%의 국민들이 생계 수단으로 삼고 있는 농산물을 살펴보자. 특히 동부고산지대(Eastern Highland Province)의 고로카(Goroka)를 중심으로 커피농사가 이루어진다. 파푸아뉴기니 커피는 세계적으로도 품질의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다른 커피생산국과 마찬가지로 파푸아뉴기니 커피농사도 실제 농사를 짓는 농민들에게는 큰 도움이 못되고 있다. 힘들여 수확한 커피를 10여 차례 물로 씻어내고 말린 원두는 1kg당 300원 내지 600원 정도 밖에는 받지 못한다. 마당(Madang)지역을 포함해서 라바울(Rabaul)과 킴베(Kimbe)지역에는 초콜릿의 원료인 카카오를 경작한다.
카카오는 그나마 돈이 되는 작물(Cash Crop)이지만, 이 또한 말리고 찌는 과정에서 농부들에게 돌아가는 순이익은 줄어들게 된다. 마당(Madang)의 해안지역 주민들에게는 코프라(Copra-코코넛 열매의 속을 말린 것. 코코넛 기름의 원료가 된다)가 그들의 주요 수입원이다. 보통 코프라의 정상적인 가격이 10만 원정도인데, 한 동안 코프라의 가격이 폭락하여 80kg 한 부대의 가격이 3만원이 안되었던 시기도 있었다. 다행히 요사이는 가격이 조금씩 정상을 찾아 사람들의 생활이 나아진 것으로 안다. 마당(Madang)지역과 함께 그에 인접한 세픽(Sepik) 지역이 한때는 바닐라로 떼돈을 벌었었다. 원래 바닐라는 아프리카의 코트디부아르(Cote d'Ivoire-상아해안: Ivory Coast로 알려진 아프리카 서해안의 공화국)가 주산지였으나 2000년대에 들어와 그곳이 엘리뇨 현상으로 바닐라가 흉작이 되면서 전세계의 수집상이 파푸아뉴기니로 몰려들었다.

흔히 바닐라를 사용하는 음식은 아이스크림으로 알려져있으나, 실제로 바닐라는 유럽 사람들에는 약품, 음식, 화장품 등 수 많은 곳에 첨가되는 없어서는 안 되는 향료라고 한다. 문제는 떼돈을 버는 것은 좋은 현상이었지만 영악한 일부 사람들이 가짜 내지는 질 낮은 바닐라를 만들어 팔아 중국인이 사장으로 있는 회사의 창고가 쓰레기 같은 저질 바닐라로 가득 찼다는 것이다. 바닐라의 색깔을 좋게 보이기 위해 검은색 구두약을 칠하기도 하였고, 무게를 늘리기 위해 바닐라 안에 못을 집어넣기도 했다고 하니, 파푸아뉴기니 사람들을 무지한 사람들이라고 얕보다가는 큰 코 다칠 것이다.
그나마 더운 지역인 해안 쪽은 코프라나 바닐라 그리고 코코아 등의 환금 작물(Cash Crop)이 있어서 살기가 낫지만, 남부고산지대는 고구마 밖에는 생산되지 않는다. 물론 금과 원유와 천연가스가 넘쳐흐르는 곳이지만 그러한 천연자원에서 얻을 수 있는 혜택은 일부 사람들에게만 돌아갔었다. “여기를 보아도 고구마밭, 저기를 보아도 고구마밭” 뿐이었던 곳이라, 고구마가 많이 생산되지 않는 1월부터 3월까지는 주민들이 까루까라는 열매를 채취하러 밀림으로 들어간다. 모든 것, 특히 식량이 부족한 곳이라서 결국 범죄가 많아지고, 사람들의 성격도 거칠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밖에, 파푸아뉴기니에서 생산되는 농작물은 팜(Palm)기름, 차(茶), 설탕, 고무, 과일, 야채, 생선, 조개, 가금류(주로 닭) 그리고 돼지를 꼽을 수 있다.

2) 공산품
파푸아뉴기니의 대표적인 공산품은 농산물과 깊은 1차 산업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즉 코코넛의 속살을 말려서 짠 코코넛 기름, 팜(Palm)열매에서 축출한 팜유, 목재를 만들고 남은 조각으로 만든 합판, 목재를 제재하고 남은 나무 조각으로 만드는 압축나무판(wood chip), 금, 은 동, 원유, 정유, 건축, 관광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나열된 공산품을 보면 겉으로는 상당히 돈이 되고, 국가 경제력에 도움이 될 것 같은 것들이지만 실제로 속을 들여다보면 “빛 좋은 개살구”라는 옛말이 딱 맞는다. 왜냐하면 모든 공산품을 만드는 공장이 외국회사이기 때문이다. 특히 오스트랄리아 계열이 많고, 합판 쪽으로는 말레이시아와 일본 회사이다. 결국 풍부한 지하자원을 파푸아뉴기니의 발전을 위해 사용하지 못하고 외국에 그대로 넘기는 형상이다. 그래서 “정치적으로는 독립했지만 경제적으로는 아직도 식민지이다”라는 표현을 쓴다. 원유의 하루 생산량이 2004년 기준으로 26,000배럴(bbl)이며, 천연가스의 연간 생산량이 2005년 기준으로 9,600만 입방미터였다.

천연가스에 대해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본회 담당 본당 구역의 몇 군대에서는 천연가스가 지표로 새어 나오는 지역이 있었다. 그래서 몇 몇 젊은이들은 가스가 나오는 입구에 장난으로 불붙은 종이를 집어넣어 폭파시키기도 하는 것을 보았었다. 이렇게 흔한 천연가스가 그대로 오스트랄리아로 운반되어 정제된 후 파푸아뉴기니로 다시 돌아오면 100kg 한 통이 6만 원정도로 값이 뛰어 돈 있는 사람들만 사용할 수 있는 괴물로 둔갑하는 것이다.

파푸아뉴기니의 주요 수출품은 원유, 금, 구리원광, 원목, 팜기름(Palm Oil), 커피, 코프라(Copra), 가재, 새우 등이며, 파푸아뉴기니의 수출상대국은 2007년 기준으로 오스트랄리아(25.9%), 일본(9.5%), 중국(5.8%)이다.

또한 주요 수입품은 기계류와 자동차와 그에 따른 부속품, 공산품, 음식, 원료, 화학약품 등이고, 주요 수입상대국은 2007년 기준으로 오스트랄리아(50.9%), 싱가폴(11.3%), 중국(7.7%), 일본(5.5%) 등이다. 한국은 자동차와 전자제품 등이 주요 수입품이고, 한국에 수출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한 바는 없지만 가끔 한국의 백화점에 파푸아뉴기니산(産) 커피가 있다는 소리는 들었다.

3) 교통시설
파푸아뉴기니의 마을과 마을을 잇는 주요 교통수단은 트럭이나 중·소형 버스인 PMV(Public Motor Vehicle-대중교통)이다. 요즈음은 12인승 버스나 24인승 버스도 많이 생겼지만 불과 5-6년 전에는 대부분의 PMV가 트럭이었다. 물론 수도인 포트모르스비(Port Moresby)에는 오래전부터 버스를 사용한 것으로 알지만, 주로 일본에서 수입한 중고 차량이었다. 파푸아뉴기니에서 짧은 시간을 살면서 사회의 변화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던 것 중의 하나가 해마다 많아지는 차량의 숫자였으며, 중고차를 밀어내고 자리를 잡기 시작하는 새차의 행렬이었을 것이다.

도(道) 내에서 마을과 마을을 잇는 대중교통은 트럭과 버스로 구성된 PMV이지만, 도(道)와 도(道)를 잇는 교통수단은 비행기이다. 파푸아뉴기니는 고속도로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그들은 주요 도로를 고속도로(Highway)라고 일컫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고속도로와는 거리가 멀다. 파푸아뉴기니에 살면서 왜 항공로가 많고 비행장이 많은지 의아하게 생각했었는데 어느 날인가 문득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유인 즉, 산을 깎고 다리를 놓아 육로를 만드는 것 보다는 자그마한 비행장을 만드는 것이 돈이 더 적게 소요되기 때문이다. 어차피 대부분의 사람들은 태어난 곳에서 멀리 나가지도 못하고 태어난 곳에서 살다가 죽는 것이니까 돈 있는 사람들-예를 들어 공무원이나 정치가 혹은 실업인은 비행기를 타고 이곳저곳 날아다니면 된다는 논리이다. 그래서 파푸아뉴기니에는 비행장이 많다. 2007년 기준으로 비행장의 숫자가 578개에 이른다. 이중 포장된 활주로를 가진 비행장이 21개이고, 비포장 활주로를 가진 비행장이 557개이다. 특히 점보기가 이·착륙할 수 있는 국제공항급이 2개임을 볼 때 파푸아뉴기니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육로(陸路)는 2000년 기준으로 총 19,600km이며 그 가운데 포장도로는 686km에 불과하고 나머지 18,914km는 비포장도로이다.

이에 비해 해로(海路)는 2006년 기준으로 11,000km이다. 상업용 선박의 수는 2008년 기준으로 총 22척이며 이중 정크선(Bulk Carrier)이 3척, 화물선이 18척, 기름 운반선이 1척이다. 이중 외국 선적이 6척인데 이 모두가 아랍에미리트연방(UAE)의 소유이다. 대표적인 항구는 킴베(Kimbe), 레이(Lea), 마당(Madang), 라바울(Rabaul), 위웩(Wewek) 등이다.

4) 종교
파푸아뉴기니는 자신들의 헌법에 그리스도교 국가(國家)임을 천명하고 있다. 그래서 국가(國歌-National Anthem))에도 하느님의 보호를 구하는 내용이 나오고 있다. 19세기말경에 유럽에서 선교사들이 들어와 그리스도교를 파푸아뉴기니에 심기 시작했다. 2000년 기준으로 볼 때 각 종교의 신자비율은 로만가톨릭이 27%로 가장 높고, 루터교(19.5%), 연합교회(11.5%), 제칠일안식일교(10%), 오순절교회(8.6%), 순복음교(5.2%), 성공회(3.2%), 침례교(2.5%), 그 밖의 개신교(8.9%), 바하이(Bahai-0.3%), 토착신앙(3.3%)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별히 한국외방선교회가 활동하고 있는 마당(Madang)대교구의 경우에는 40%이상이 가톨릭이며, 멘디(Mendi)교구의 경우는 10%를 약간 넘는 수준이다. 그러나 멘디교구의 마가리마 본당은 인구의 70%가 가톨릭 신자
인 특별한 지역이었다. 마당대교구와 멘디교구의 가톨릭 신자 비율을 보면 현저한 차이를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마당이 바닷가를 끼고 있는 지역이라 유럽에서 온 선교사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마당(Madang)지역이라고 하더라도 내륙지역은 가톨릭 신자보다는 루터교 신자들이 더 많다. 이미 해안지역에 가톨릭 교세가 자리를 잡은 후에 루터교 선교사들이 도착했기 때문에 루터교는 가톨릭이 아직 들어가지 않은 내륙으로 들어가서 선교했고 자신들의 교회를 지었다. 반면 고산지대인 멘디교구는 1955년에 처음 한 명의 가톨릭 선교사제가 발을 들여 놓고 1956년 4명의 선교사제가 더 도착하면서 선교를 시작했다.

대체로 멘디를 포함한 고산지대에는 가톨릭 보다는 개신교의 교세가 더 크다. 특별히 마가리마 본당을 보더라도 큰길 옆에는 어김없이 개신교의 작은 예배당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 가톨릭교회는 큰 길에서 벗어난 한 쪽 구석에, 혹은 산꼭대기에, 혹은 골짜기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하지만 개신교의 목사나 전도사들과 또한 개신교 신자들과도 우호적으로 지냈었다. 길가다가 만나면 잠시 쉴 겸 멈추어 서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고, 서로 격려해 주었었다. 또한 개신교 신자들도 본회 사제가 혼자 길을 걷고 있으면 다가와서 배낭을 빼앗아 짊어지고 걸어가 주기도 했었다. 외국인이 자신들을 위해 고생한다고 생각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비록 교파는 달라도 항상 감사하다는 말을 해주었고, 건강하라는 인사도 잊지 않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