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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


대만> 선교지 소개

 


1. 대만 선교 역사

1) 대만 선교와 관련된 희미한 지난 기억들
중국 본토에서 불과 100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대만(台灣) 섬에 천주교가 들어온 것은 1859년5월이다. 이 때 대만에 첫발을 디딘 선교사들은 도미니코 수도회 회원들이며, 이 해를 대만에 천주교 신앙이 전래된 원년으로 삼는다. 이에 따라 2009년은 대만에 천주교 신앙이 전파된 지 150주년이 되는 해다.
그러나 대만이 천주교와 접촉한 역사는 실제로 이 보다 훨씬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626년 당시 동방에 진출한 스페인 세력이 대만에 무역 거점을 설정하면서, 이들과 함께 온 스페인 출신 선교사들이 이 땅에 발을 디딘 적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당시 대만에 정착하여 16년 정도 활동한 시점에, 네덜란드 상선(商船)이 이곳을 무역 거점으로 삼기 위해 진출하면서, 그들에게 패한 스페인 세력이 물러나고, 스페인 선교사들도 이곳에서 함께 축출되고 만다. 스페인 선교사들이 이곳을 떠난 뒤, 모든 것은 이전 상태로 되돌려지고, 그 뒤 이 땅에서 천주교 신앙이 어떻게 지속되었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2) 대만 본토 선교
청(淸) 정부 말기 국운이 쇠하던 시기, 청과 영국과 벌인 이른바 아편전쟁(鴉片戰爭)에서 청은 결국 영국에 패배하였다. 청이 패전국으로서 1842년에 승전국 영국과 맺은 이른바 불평등 조약인 난징조약(南京條約)의 내용 가운데, 통상(通商)을 위하여 광저우(廣州)· 푸저우(福州)· 샤먼(厦門)· 닝버(寧波)· 상하이(上海) 등 5개 항구(港口)를 개방하기로 했다. 이와 같이 청 정부가 본의 아니게 문호를 대외에 개방하게 되자, 그 때까지 각종 어려움과 위험을 무릅쓰고 중국 각지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선교사들은 이전에 비하여 비교적 자유로운 입출국과 활동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중국 곳곳에서 보다 활발한 선교활동이 가능하게 되었다.

앞서 언급한 난징 조약의 체결 뒤, 그 조약 내용을 실현해 가는 과정에서 중국 영토 가운데 몇몇 지역을 외국에 할양하는 것이 다반사가 되었고, 일련의 이런 과정 속에서 중국(淸朝)의 부담은 갈수록 가중되었다. 1858년에 청 정부는 영국과 또 다른 조약을 체결하게 되는데, 그것이 이른바 티엔진 조약(天津條約)이다. 원래 난징 조약에서 청은 영국에 5개의 항구를 개방하기로 했는데, 여기에 더하여 티엔진 조약에서 청이 영국에 개방할 항구 3개가 추가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대만(台灣)이다. 이처럼 대만도 대외에 정식으로 개방되어 외국인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되자, 티엔진 조약 체결 1년 뒤인 1859년5월에 애초 푸지엔성(福建省) 샤먼(廈門)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도미니코회 회원들이 대만으로 건너온다.

이처럼 중국 본토 이외에 대만마저 대외에 개방되자, 푸지엔성(福建省) 샤먼(廈門)에서 해협(海峽)을 건너 대만 섬에 도착한 스페인 출신 도미니코회 선교사들에 의하여 대만 선교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린다. 이 때 대만에 첫발을 디딘 선교사는 스페인 출신 도미니코 회 소속 페르난도 사인스 신부(Rev. Fernando Sainz,O.P. 중국명 郭德剛) 등이다. 페르난도 사인스 신부는 그의 동료 한 명과 또 그와 동행한 푸지엔 성 출신의 교우 한 가족과 함께 대만 남부 가오슝(高雄)에 자리를 잡는다. 그 뒤 1859년 12월에 그들은 가오슝에 토지를 매입하여 성당을 건립하게 되는데, 이곳이 바로 오늘날 현존하는 가오슝 교구 주교좌인 로사리오 성모 대성당(??이다. 또한 이곳은 바로 대만 천주교 복음 선교 150년 역사의 발원지(發源地)로 자리 매김 된다.

  그들은 이와같이 선교 활동의 거점을 마련한 뒤, 대만의 복음 선교 활동은 한 획을 긋는다. 곧 1861년 도미니코회 신부들은 그들의 선교활동의 범위를 가오슝 인근 지역인 핑동(?까지 확장하여, 완루안(萬巒)에 초가로 된 성당을 마련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성당은 교회를 적대시하는 사람에 의하여 전소되어 버리고 만다. 그 뒤 성당을 새로 지어 1869년에 낙성식이 거행되었는데, 이 성당이 오늘날 대만 교우들에게 대표적인 순례지가 된 가오슝(高雄) 교구에 있는 완진(萬金) 성모 대성당으로, 가오슝의 로사리오 성모 대성당과 함께 대만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도미니코회 신부들의 선교활동을 위한 노력은 계속되어, 그들의 발걸음은 핑동 지역 원주민 마을에까지 이른다.

또한 그들은 대만 남부에만 머무르지 않고 대만 북쪽으로 올라가며 선교활동을 계속한다. 먼저 그들의 발걸음은 타이난(台南) 장화(彰化)에 닿는다. 그리고 1882년에 마침내 대만 중부에 처음으로 성당이 건립되는데, 그것이 바로 뤄추어(羅?에 세워진 성당이다. 1884년 뤄추어의 셀레도니오 아란스(Celedonio Arranz,O.P. 중국명何安慈) 신부는 각고의 고생 끝에 타이베이(台北) 현 루저우(蘆洲)에 도착하였다. 한편 선교사들은 현지에서 평신도 선교사들을 양성하여 고용했는데, 그들 유급 평신도 선교사들의 역할은 지대했다. 그들의 도움으로 마침내 대만 북부의 첫 번째 성당이 문을 열게 되니, 그곳이 바로 1886년에 세워진 오늘날의 타이베이 현에 있는 루저우(蘆洲) 성당이다. 이어 인구가 밀집하고 비교적 번화한 타이베이 시내에는 1905년에 복음 선교가 정식으로 시작되었고, 도미니코회 클레멘테 페르난데스 신부(Rev. Clemente Fernandez,O.P. 중국명 林茂才)가 성당을 건립했으니, 그곳이 오늘날 타이베이 대주교좌 성당 자리이다. 이 성당이 타이베이 시에 세워진 첫 번째 성당이다. 이 시기에 이르러 대만 남부에서 시작된 복음 선교가 마침내 대만 북부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3) 일본 식민지 시대의 대만 선교
일본 식민 치하의 대만은 일본에서 유입된 신도(神道)와 지방의 민간신앙 등의 영향을 받아, 대만에서 천주교 복음 선교 활동이 다소 난관에 봉착하는 일이 있긴 했어도, 일본 정부가 종교정책에 있어 비교적 관용의 자세를 취함으로써, 민간 신앙이든 외국에서 전래된 종교든 그리 큰 간섭은 받질 않아서, 종교는 그 나름의 활동 영역과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고, 서양 선교사들도 큰 제한 없이 어느 정도 자유롭게 선교 활동에 종사할 수 있었다. 이런 정황에서 1913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1년 전, 대만과 중국 본토의 샤먼 교구가 분할되어 대만은 더 이상 샤먼 교구에 속하지 않고 이제 정식으로 독자적인 감목구(監牧區)가 된다. 그리고 대만 감목구의 첫 감목으로 앞서 언급한 도미니코회 클레멘테 페르난데스 신부가 임명되었다. 1920년 클레멘테 페르난데스 신부가 자신이 속한 도미니코 수도회의 명을 받고 필리핀으로 파견되자, 같은 도미니코회의 토마스 데 라 호스(Thomas de la Hoz, O.P. 중국명 楊多? 신부가 그의 자리를 계승하여, 대만 감목구 제2대 감목이 된다. 이런 과정에서 대만 천주교는 안정 속에 성장을 지속하였다. 대만이 독립 감목구가 된 뒤, 사제 양성에서도 점차 그 기반을 다지게 되었으며, 1936년에 대만에서 첫 사제 투민정(?의 서품식이 거행됨으로써, 대만은 비로소 본토(방인) 출신 성직자를 배출하기 시작했다.


4) 8년에 걸친 청일 전쟁 시대의 정체된 대만 선교
대만 천주교회는 청일전쟁이 발발하던 1937년까지 비교적 안정된 분위기에서 선교활동을 수행했다. 그러나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대만에 대한 일본의 정책은 큰 변화를 가져왔는데, 종교에 있어서도 더 이상 포용의 자세를 보이지 않았으니, 천주교도 엄격한 감독과 제약을 받았다. 게다가 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발발한 뒤에는 대만 총독부에서 적극적인 황민화(皇民化) 정책을 추진하며, 사람들의 개인 신앙생활에까지 개입하기 시작했는데,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신사참배(神社祭拜)의 강요였다. 또한 대만에 여전히 체류하고 있는 외국 선교사들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경우에 따라서는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주거와 언행 등 그들의 생활이 이처럼 극도의 제한과 구속을 받는 가운데, 결국 그들의 선교활동은 큰 제약을 받게 되었다. 물론 원칙적으로 그들의 선교활동 자체가 금지된 것은 아니지만, 이와 같은 제약은 갈수록 심화되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일종의 절충과 타협인데, 선교활동을 중단시키지 않고 지속할 수 있는 길은 일본인 신부가 대만에 와서 사목하게 하는 것이다.

결국 이 같은 방침에 따라 1941년 일본 나가사키(長崎) 교구의 사토와키 아사지로(里脇淺次郞) 신부가 대만에 들어와서, 제3대 대만 감목이 된다. 따라서 이 시기에 대만 천주교는 일본이 주도하게 되었고, 도미니코회 신부들은 제2선으로 물러났다. 곧 일본인 신부가 대만 감목구의 감목직을 위임 받으면서, 대만 천주교는 일본천주공교(日本天主公敎)에 가입하게 되었고, 일본천주교회의 통할을 받게 된 것이다. 그 뒤 8년간의 청일 전쟁이 끝난 이듬해 1946년에 나가사키 교구에서 파견되어 대만 감목을 맡았던 일본인 신부가 고국으로 돌아가고, 감목직은 대만 본토 성직자가 맡게 된다. 이에 대만 방인 사제로서 처음 감목직을 맡게 된 사람은 앞서 언급된 대만의 첫 번째 방인 사제 투민정(?신부이다. 그가 2년간 감목직 대리 임무를 마친 뒤, 1948년 도미니코 회 호세 M. 아레궤이 신부(Rev. Jose M. Arregui, O.P. 중국명 陳若瑟)가 로마 교황청에 의하여 정식으로 대만 감목구의 감목으로 임명된다. 이처럼 일본 식민통치 아래서 대만의 선교사들은 선교활동에 있어 각고의 어려움을 겪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과 일본군이 대만을 떠나면서 대만 교회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전쟁과 식민통치의 터널을 빠져 나온 당시, 대만에 남아 있는 신부는 고작 12명이었고, 신자 수는 8천 여 명 정도에 불과했다.


5) 90년 뒤의 큰 변화
천주교가 대만에 전래된 90년 뒤인 1949년에 대만 해협 건너편 중국 대륙의 정국이 크게 변하였다. 중국 본토 각지에서 활동하던 외국 신부들은 중국 공산당의 반종교 정책에 따라 추방당하거나 구금되는 운명에 처했다. 이런 정황에서 외국 신부들은 물론이려니와 대륙 본토 출신 성직자와 남녀 수도자들도 교구 소속이든 수도회 소속이든 모두 이와 같이 어수선하고 불안한 시국에 직면하여, 신변상의 안전과 교회의 장래를 생각하여 불가피하게 고국을 등지고 중국 본토 밖으로 피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대만으로 건너오고, 또 어떤 이들은 홍콩과 마카오로 혹은 필리핀으로 건너갔고, 그 밖에 어떤 이들은 제3국으로 떠나기도 했다. 이 때 대만 교회는 중국대륙에서 갑자기 밀려들어 오는 사제들로 인해, 사제수가 급증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교황청 포교성성(지금의 인류복음화 성)의 지시에 따라, 각 교구를 세밀하게 분할하기에 이른다.


6) 대만 광복 초기 - 변화 가운데 맞이하는 새로운 국면
1949년 10월 중국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이 선포되고, 공산당 정권의 탄압을 피해 그 전에 중국 본토를 떠난 성직자와 수도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국민당 정권과 함께 대만으로 건너왔다. 이로써 대만 천주교는 유사 이래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를 보유하게 되었고, 활발한 선교활동이 진행되었다. 이에 교황청은 대만 천주교의 급변한 상황과 성장을 고려하여, 대만 감목구를 남과 북으로 양분하여, 두 개의 감목구를 설정한다. 이에 기존의 대만 감목구의 감목 도미니코 회 호세 M. 아레궤이(Jose M. Arregui, O.P. 중국명 陳若瑟) 신부를 새로 분할된 남부 가오슝 감목으로 임명하고, 중국 본토에서 설립된 방인 수도회 주투회(主徒會)의 꿔뤄스(郭若石) 신부를 새로 분할된 북부 타이베이 첫 감목으로 임명했다. 도미니코회 신부들은 대만에 온 뒤, 대부분 주로 대만 남부를 중심으로 선교활동에 종사했다. 반면에 1949년에 대만 북부 타이베이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신부들은 외국인 신부와 중국인 신부를 합해도 모두 10명이 채 되지 못했다. 이때까지 몇 명의 도미니코회 신부들과 대만 남부 출신 방인 신부들이 대만 북부에 와서 복음 선교 활동에 종사했다. 이 무렵 전 대만의 교우 수는 수 천 명 정도를 유지하게 된다.

한편 당시 대만의 성직자와 교회의 규모(교세)를 고려할 때, 1949년에 시작된 대만 사회의 급격한 변화는 새로운 판도를 형성했다. 당시 대만은 일본군이 막 철수하고, 이른바 광복을 맞이한 지 오래되지 않은 전후(戰後) 복구 시기이기 때문에, 사회 각 부문을 재건하는데 많은 비용이 필요했다. 이런 시점에 중국 본토에서 철수한 국민정부의 부대와 함께 수많은 사람들이 대만으로 물밀듯이 밀려들어왔는데, 그들은 중국 대륙의 각 성(省) 출신으로, 이들을 통칭해서 이른바 '외성인(外省人)'으라 부르니, 이는 곧 대만성(台灣省) 바깥 성 출신이라는 뜻이다.

이런 정황에서 중국 본토에서 대만으로 건너온 선교사(성직자, 수도자)들은 그들이 중국인이든 아니면 일찍이 중국에서 선교활동에 종사하던 외국인이든 대만에서 모두 비슷한 처지에서 적응하며, 이미 그들에게 익숙한 언어(Mandarin)로 활동하게 된다. 이로써 대만 천주교회는 큰 원군을 얻은 셈이 되었고, 변화하는 시국에 부응하게 된다.  당시 포교성은 중국 대륙에서 모여든 각 수도회 선교회가 효과적으로 대만 선교에 임할 수 있도록 그들의 관할권을 조정하였다. 이에 따라 대만 북부 지역은 중국 방인 수도회 주투회(主徒會)에 맡겼고, 메리놀 외방 선교회(瑪利諾會)는 먀오리(苗栗), 예수회(耶蘇會)는 신쭈(新竹), 프란체스코회(方濟會,작은형제회)는 타오위엔(桃園), 가밀로회(靈醫會)는 뤄동(羅東), 구주회(救主會)는 이란(宜蘭)을 맡도록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의 씨앗이 대만에서 계속 뿌리내리고 성장하도록 고무하였다.

성청(the Holy See)이 대만 감목구를 남 대만 감목구와 북 대만 감목구로 양분 한 뒤, 이어 1951년에 타이중(台中) 감목구를 설립하고, 그 이듬해 1952년에 다시 쟈이(嘉義)와 화리엔(花蓮) 감목구를 각각 설립하였고, 이와 동시에 1949년에 감목구가 된 타이베이 감목구를 이 때 곧바로 대교구로 승격했다. 그리고 타이베이 대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꿔뤄스(郭若石) 신부가 임명되었다. 이에 꿔 신부가 대주교로 서임되어, 타이베이 대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착좌하기에 이른다.


7) 밀가루는 과연 어떤 효과가 있었을까?
1949년 이후 대만의 교우 수는 원래 1만 여명에서 몇 배로 증가하였다. 이 시기에 대만의 교우수가 급증한 주요 원인이 교회가 배급한 밀가루 우유 같은 물자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밀가루 같은 구호품이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교회로 끌어들이는 힘을 발휘했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그 당시 교회가 배급한 이런 구호품이 신앙과 교환하는 조건은 아니었다. 그 당시 교회가 이와 같은 물자를 공급한 것은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보살피는 교회의 오랜 전통에 부응하는 것이었을 뿐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세대에서 세대를 거쳐 오며, 교회는 늘 구체적인 행동으로 사람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도록 배려하고 보살펴왔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러한 애덕에서 비롯된 자선 행위의 본뜻이 자주 왜곡되어, 대만에서는 천주교를 그저 필요할 때 언제나 가서 무언가를 얻어낼 수 있는 한낱 자선기구 정도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흔하다. 이런 정황에서 교회의 애덕 행위를 통해서 드러난 신앙의 본뜻이 모호해지기도 했다.


8) 대만 천주교의 현실
천주교가 대만에 공식적으로 전래된 지 어언 150년이 되었다. 그러나 2천 여 년에 이르는 그리스도교 선교 역사에 비하면, 대만 천주교는 여전히 어린 나이다. 어리면 어린 만큼 미숙한 점이 있고 결핍된 점 또한 없을 수 없지만, 푸른 새싹처럼 무한한 성장 가능성을 담보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현실의 단면만 보고, 미래의 정황이 어떠할 것이라고 정확히 예단하기도 어렵다.

대내외적으로 대만 천주교의 현재의 위상을 드러내는 것 가운데 하나가 교회의 상급 기관이라 할 수 있는 '주교회의'의 위상이다. '중국주교회의(中國主?'의 전신으로 1948년 '교무협진위원회(?'가 상하이(上海)에서 설립되었다. 그 뒤 중국 공산당의 탄압을 피해 대만으로 건너온 중국 교회의 주요 인사들은 1952년에 대만 타이베이(臺北)로'교무협진위원회' 사무소를 이전했다. 그 뒤 1967년 정식으로 '중국주교회의'를 설립하여 로마 성청으로부터 인준을 받는다. 이는 명실공이 중국 대륙과 대만을 포함한 전 중국 천주교회를 대표하는 주교회의였다. 그러나 1997년11월1일 당시 타이베이에 사무실 주소를 둔 '중국주교회의(中國主?'는 주교회의 명칭을 바꾸는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그 이듬해(1998년) 1월18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대만 남부 가오슝 교구 교구장이며, 당시 중국주교회의 의장 산궈시(單國璽) 주교를 추기경에 임명했고, 이어 같은 해 4월1일 기존의 '천주교중국주교회의(天主??'를 천주교대만지역주교회의(天主??'로 개칭했으며, 이를 줄여 대만 국내에서는 '대만주교회의 (台灣主?'로 부른다.

  이와 같은 주교회의의 위상 변화, 곧 전 중국을 대표하는 명칭인 '중국 주교회의'에서 국제정치외교의 현실을 반영하여 '대만 지역 주교회의'로 축소한 것은 당시 중국(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를 도모하는 바티칸의 입장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근래에는 잠시 수면 밑으로 가라앉은 듯하지만, 바티칸(성청)이 중국과 수교를 하게 되면, 그 전제 조건으로 대만(중화민국)과 외교관계를 단절해야 할 것이라는 설이 한동안 뉴스에 오르내렸다. 이와 같은 일이 현실화될 때를 대비하여, 대만 교회에서 영향력 있는 몇몇 성직자들은 교회 매체를 통해 이 곳 교우들이 바티칸과 중국의 수교에 따를 파장에 심리적으로 대비하도록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정치외교 측면에서 볼 때, 중국의 각종 압력으로 대만은 국제적으로 점차 고립되어 가고 있는 터에, 대만 천주교의 위상도 그보다 크게 나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대만 교회가 이제는 도래할 현실을 기정사실화하고 담담해진 모습으로 교회의 일상에 전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40년간 신자 증가율이 거의 정체된 상태에 있으며, 현재 대만 인구 2천3백만 명 가운데 신자 수가 30만 명에도 채 미치지 못하고 있다(2012년 어느 매체의 통계에 따르면 대만 천주교 신자는 심지어24만 여명으로 집계되었는데, 아마 이는 허술했던 기존의 신자 통계를 보정한 결과로 보임). 또한 대만 천주교는 대 사회적으로 자선 및 사회복지 사업 기관이라는 이미지 외에는 별다른 영향력도 없으며 뚜렷한 입지도 구축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대만 천주교회에 몸 담고 사는 외국인 선교사가 체감하는 현실은 이 곳의 그리스도교 신앙의 토양이 무척 척박하다는 것이다. 대만 천주교의 신앙 현실이 이러함에 불구하고 어떤 의미에서 경계인과도 같은 선교사는 하느님 안에서 그래도 애써 희망을 두고, 이들의 벗으로 부단히 살아가야 할 것이다.



2. 선교지의 이모저모

대만 개관

-국명: 중화민국(中華民國, Republic of China)
-면적: 35,834 km2(부속도서 포함)
-인구: 약2천3백만 명
-수도: 타이페이(臺北, Taipei - 인구: 약 2백6십만 명)
-인종: 한인(漢人) : 98%, 대만 원주민(14부족):약2%
-언어: 3종의 한어(漢語) -보통화(만다린), 대만(민난어)어, 커쟈어 및 대만 원주민14부족어
-종교: 민간도교(민간신앙), 불교
-정체: 민주 공화국


(1) 역사

대만이 청 정부(중국) 영토에 처음으로 편입됨

강희 대제(淸朝 康熙)때인 1683년에는 청 정부(淸朝)가 이전의 네델란드 세력을 몰아내고, 그 때까지 대만을 사실상 통치하던 정청공(鄭成功) 가문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그 뒤 대륙 정권인 청 정부는 대만에 정식으로 부(台灣府)를 설치하여 대륙 푸지엔 성(福建省) 관할 아래 두고 실질적으로 대만을 통치한다. 이때부터 '대만(台灣)'이라는 글자가 대만과 그 부속 도서를 일컫는 고유 명칭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본 식민 통치

그 뒤 1895년 4월, 대만 역사상 가장 비정한 역사의 한 페이지가 기록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시모노세키 조약(下關條約)이다. 청 정부를 대표하는 리홍장(李鴻章)은 청일 전쟁 패전의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고, 일본 야마구치(山口)현 시모노세키에 있는 순판로에 도착하여, 일본을 대표하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조약을 체결한다. 중국 역사상 가장 무력하고 치욕스런 조약으로 기록되는 이 조약에서, 리홍장은 중국 본토의 랴오동(遼東)반도와 함께 대만과 대만에 부속된 섬 펑후(彭湖)를 일본에 할양(割讓)한다는 조약문에 서명했다. 리홍장이 서명한 이 한 장의 종이로 결국 장래 대만의 정치적 운명이 결정되었으니, 1945년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할 때까지, 대만은 무려 50년 동안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게 된다.

일본 식민 통치 종식과 대만의 해방 공간 ? 228 사건

1945년8월15일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 선언을 한 뒤, 같은 해10월25일 중국 국민정부는 정부군과 당시 푸지엔성 주석(福建省主席) 천이(陳儀)를 대만에 파견하여 일본군의 투항을 받아내고 일본의 식민통치 업무를 접수한다. 당시 대만 현지를 장악한 천이(陳儀)와 그가 인솔하는 국민정부 군인들과 외성인 관료들이 일본인이 떠난 뒤 남긴 재산을 독식하고, 모든 행정망과 경제를 장악했다. 그리고 대만을 통치하는데 있어 외성인이 모두 윗자리를 차지하고, 대만인은 고작 말단의 직무를 위임 받는 정도였다. 그나마 대만 본토인은 당시 관방어 만다린을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공직에서 배제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극도의 박탈감을 느끼고 소외된 대만의 민심은 흉횽해졌다. 이렇게 되자 대만인은 외성인을 대만을 식민 통치했던 일본군과 다름없는 또 하나의 침략자로 여기게 된다. 거기에 더하여 당시 대만 주둔 국민정부 통치아래서 1947년2월28일 발생한 비극, 이른바 228 대학살이라고도 불리는 참혹한 사건을 격은 뒤 대만의 민심은 국민정부로부터 완전히 돌아섰다.

228 사건 때 국민정부의 군인들이 무력으로 대만 본 성 사람들을 유혈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로써 국민정부와 함께 대륙에서 건너온 외성인과 대만 본 성 사람들 사이에 쉽게 해소되기 어려운 적대감이 형성됐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정부는 당시 대만 현지 지휘관을 교체하고 여러 가지 수습책을 마련하여 민심을 달래고 사태를 완화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양자 간의 감정의 골은 깊어지고 그 적대감을 완화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세대가 바뀌면서 겉으로 드러나는 이와 같은 적대감이 대부분 완화되거나 거의 소멸된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여전히 대만 사람들의 의식 속에 원죄처럼 낙인이 찍혀, 언급되면 불편해지는 금기처럼 여기게 됐다.

그리고 228 사건 이후 대만 사람들 사이에서 대만은 독립해야 한다는 의식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그것이 오늘날 대만 독립이라는 여론을 형성한 단초가 되었다. 사실 오늘날 대만 사회는 대만 독립을 추종하는 세력과 중국 대륙과 통일을 이루자는 두 세력 간의 첨예한 갈등으로 국론이 분열된 상태이며, 이 갈등과 분열을 치료할 적절한 해법을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이 점은 대만 사회가 현재 직면한 가장 큰 도전이자 숙제이다.

한편 쟝지에스(蔣介石,1887-1975)가 이끄는 '중국국민당'(이하'국민당'으로 약칭) 이'중국공산당'(이하'공산당'으로 약칭)과의 무력 패권 다툼(國共內戰,1945-1949)에서 패배한 뒤, 그래도 다시 중국 대륙을 수복할 마지막 한 가닥 꿈을 가지고 1949년 대만으로 공식 철수했다. 중국 공산당의 주요 지지계층이 당시 약80%에 이르는 중국 대륙의 빈농들이었던데 반하여, 국민당을 지지하는 주요 계층은 전체 인구 가운데 약 20 %에 이르는 중상공업자들이었다. 그러나 국민정부가 대만으로 철수 할 당시, 중국 대륙의 이른바 부르죠아 계층은 대부분 홍콩이나 더 멀리 안전한 곳으로 피난을 했다. 그리고 정작 국민정부와 함께 대만으로 피난 온 대다수는 쟝지에스와 그 휘하 병력 이외에 모두 그 정권에 대한 특별한 충성심에서라기보다는 다른 곳으로 피난 갈 형편이 못 되는 보통 사람들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50년 간 대만을 식민통치하던 일본군이 철수하고 대만에 독자적인 정치세력이 형성되기 전, 이처럼 급작스레 대만에 밀어닥친 중국 대륙 국민당 정권과 대만 주민들의 관계가 그래도 처음 잠시 동안 괜찮았는데, 그것은 앞서 언급한 대로 대만과 중국본토의 통일의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역시 앞서 살펴봤듯이 일본군이 물러간 뒤 국민정부가 대만에 파견한 첫 통치 집단이 권력의 공백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탓에 그 정치적 부담은 이후에도 지속됐다.

국민당 정권의 계엄 통치

이런 가운데 국민당 정권은 일본이 일찍이 대만을 식민지로 경영하던 시절 건설한 교통과 통신 기반 시설을 확보했다. 뿐만 아니라 일정시대를 거치며 당시 대다수 대만 사람들이 기초 교육을 받았고, 또 대만 사람들 대부분이 일찍이 일제치하에서 권위주의 통치방식에 익숙했던 까닭에, 권위적인 국민당 정권은 비교적 쉽게 대만에서 통치의 기반을 다졌다. 이런 배경에서 대만에서 선의로 민주적인 통치를 하기에는 여전히 정치적 부담이 컸던 국민당 정권은 결국 계엄령에 따라 대만을 통치하기 시작한다. 이처럼 계엄령에 따른 권위주의 통치는 장지에스 사후 권력을 승계한 아들 쟝징궈(蔣經國,1910-1988)시대에 이르러 해체된다. 그 때가 1987년7월15일이며, 이로써 무려 38년간에 걸친 계엄통치가 막을 내렸다. 쟝지에스 통치 당시 중화민국은 유엔(국제연합)상임이사국 회원국으로 국제무대에서 일익을 담당했다. 그러나 1971년 10월 제26차 유엔총회의 제2758호 결의로 중화민국이 유엔에서 퇴출되며, 그 빈자리를 대륙정권인 중화인민공화국이 계승하게 된다. 더욱이 1970 년대 들어 미국과 중국(중화인민공화국) 간의 화해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거기에 더하여 1975년 쟝지에스가 사망한 뒤, 1978년 결국 미국은 장차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할 것을 발표하며, 이와 동시에 중화민국과 외교 관계를 중단하고, 더불어 일찍이 미국과 중화민국 간에 체결된 공동방어조약을 중지한다는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1979년 1월 1일에 미국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한다.

대만 민주화 운동과 정치의 자유 획득

이어 1979년에는 이른바 대만의 대표적인 민주화 운동인 메이리따오 사건(美麗島事件)과 국내외적으로 정치적 지각변동을 겪게 되고, 변화하는 국제 정세의 추세에 따라 국내적으로도 정치개혁의 필요성이 증대되는 가운데 쟝징궈는 점차 개방과 자유화에 입각하여 개혁을 도모한다. 그 일환으로 국민당 정권은 대만 토착 정당인 민주진보당(民主進步黨, 이하 '민진당'으로 약칭)의 정치활동을 보장하고, 이어 쟝징궈가 세상을 떠나기 전 해인 1987년 앞서 언급된 계엄령 해제가 선포되었고, 역시 같은 1987년에 그 동안 대륙의 가족 상봉을 금지한 규정을 해제됐다. 이와 같은 일련의 움직임으로 대만은 정치 사회적으로 급속히 개방과 자유화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1988년 쟝징궈 사후 대만 본토 출신 리덩훼이(李登揮)가 총통직을 계승하면서 점차 국민당 정권의 권위주의 정치 시대와 작별하고 경제가 고도로 성장하는 가운데 대만 사람들의 자신감도 고무됐다. 또한 이때부터 대만 독립을 주창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공공연히 여론화되기 시작한다. 한편 리덩훼이 통치기간(1988-2000)에 처음으로 민주적 절차에 따라 주요 지방 자치 단체장 직선제가 실시(1996년)되고, 장징궈 사후 부총통으로서 총통직을 계승했던 리덩훼이도 자신의 두 번째 임기 총통직에 출마하여 국민의 첫 직접 선거로 총통에 선출(1996년) 된다. 또한 의회도 점차 본래의 기능을 되찾았으며 경제적으로도 전성기를 이뤘다. 리덩훼이의 정치적 배경은 국민당이었으나, 대만 본토 출신인 그는 은근히 대만 독립 노선을 지지하고, 그런 방향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그의 뒤를 이어 역시 민주 절차에 따라 야당인 민진당 출신 천스웨이비엔(陳水扁)이 대만(중화민국)의 총통으로 선출(2000년)되어 중화민국 유사 이래 국민당에서 민진당으로 첫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역사적인 정권교체를 이룬 민진당은 실제로 중화민국 정부가 계엄을 해제하기 1년 전인 1986년에 설립됐고 그 해 의회에 진출했다. 그리고 장기간에 걸친 계엄과 그 계엄통치의 주역인 쟝지에스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뒤 다소 느슨해진 분위기에서 정치권에 진입함과 동시에, 계엄해제를 촉구하는가 하면, 자신들이 대만 본토 정당이고 이에 대하여 국민당 정권을 외래정권으로 규정하여, 대만 본토 정치 집단으로서 그 성격을 명확히 하여 국민당과 대립각을 세웠다. 나아가 대만 본토에서 출생한 민진당 정권은 아예 공공연히 대만 독립공화국을 주창하며, 이에 따라 헌법 개정도 시도했으나, 이는 여전히 시의에 맞지 않아 좌절되고 만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유명무실한 중화민국 대신 실질적으로 대만 공화국이 합법 정부임을 인정받으려는 시도로 유엔에 몇 차례에 걸쳐 '대만 공화국' 의안을 제출했으나, 번번이 거부당했다. 천스웨이비엔이 영도하는 8년간의 민진당 정권의 통치 기간(2000-2008)은 대만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가장 고조된 때인가 하면, 중국 대륙 정권과는 정치 외교적으로 긴장 국면이 조성된 때였다. 그 뒤 정권은 2008년에 다시 국민당으로 교체됐다. 현재 마잉지어우(馬英九) 정부와 그가 영도하는 집권 국민당은 공공연히 대륙과의 통일을 주창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기본 노선은 중국대륙 정권과의 화해와 교류를 추진하는 친 중국 통치를 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대만 독립 노선을 견지하여 대만 자주 독립파라 할 수 있는 야당(민진당) 인사들은 이와 같은 현 정권에 대하여 경계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다.


(2) 자연환경


1) 지형
지리상의 범위를 살펴보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대만(台灣)은 실제로 대만 섬 서쪽에 있는 펑후 군도(澎湖 群島)까지 포함한다. 곧 대만의 지리 영역은 크고 작은 섬으로 구성되었으니, 대만 본섬에 부속된 섬(島嶼)은 주요한 섬이 13개에 이르고, 펑후 군도(澎湖 群島)는14개의 주요 섬(島嶼)로 이루어진다.

1544년에 포르투갈 사람들이 탄 선박이 처음 대만 해협을 지나다 대만 섬을 답사 한 뒤, 그 아름다움과 열대성 기후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그 뒤 대만 섬은 서양에서 만든 항해도에 삽입되고, 아름다운 섬(美麗島, Ilha Formosa)으로 표기됐으며, 이와 함께 펑후 군도(澎湖群島)는 어부들의 섬(漁翁島,Ilha Pescadores)으로 표기됐다. 그 뒤 유럽인들이 모두 그와 같이 불렀으며, 이 섬들을 대 중국무역의 근거지로 삼으려고 서로 각축을 벌인다.

대만 본토의 면적은 모두 35,759 km2이며, 그 부속 도서까지 포함하면 35,834 km2이다. 대만 섬은 그 모양이 고구마나 방적기계의 방추(紡錘), 혹은 바나나 잎처럼 생겼다. 대만 본섬은 제일 남쪽에 위치한 어루안삐(鵝鸞鼻)에서부터 제일 북쪽에 위치한 푸궤이쟈오(富貴角)로서 남북으로 총 길이 394 km이며, 동서로는 제일 동쪽 신깡(新港)부터 제일 서쪽에 위치한 신서(新社)까지 그 폭이 144 km에 이른다. 대만 섬과 중국 대륙 사이의 거리는 그 폭이 제일 짧은 곳이 135 km에서 제일 폭이 큰 곳으로는 200 km에 이르는 거리를 둔 대만 해협(海峽)이 가로지른다. 그리고 그 해협의 위치는 중국 대륙 푸지엔 성(福建省) 동남해상에 위치해 있다.

대만 섬의 형세는 특이하다. 전제 면적의 3분의2가 산간지역에 속하고, 3분의1이 평지에 속한다. 해발 3,000 m 이상 되는 봉우리가 62 개이고, 그 가운데서 22개의 봉우리는 3,500 m가 넘는 등 고산준령이 즐비하다. 그 중 위산(玉山)은 3,950 m로 대만은 물론 동남아 지역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이다.

2) 기후
한편 대만의 기후는 해양성 기후에 속하여 여름에 고온 다습하고 비가 많이 내린다. 그리고 이곳은 홍수와 더불어 지진과 태풍도 빈번히 발생하며, 매년 7월부터 9월에는 특히 태풍과 홍수가 내습하는 계절이다. 이곳에서도 사계절을 구분하지만, 실제로 봄과 가을이 매우 짧고 그 경계가 모호하다. 대략 5월에서 10월까지 비교적 덥고, 11월에서 4월까지 상대적으로 시원하거나 싸늘하다. 한편 북회귀선이 대만 중부를 가로지르는데, 특히 겨울철에는 이 북회귀선을 기점으로 남북 간의 기온 차가 두드러져서, 겨울에도 북회귀선 이북에 비하여 남부는 비교적 온난한 편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이곳은 6월에서 9월까지 특히 덥고, 12월부터 2월까지 비교적 추운 날씨가 이어진다. 이곳의 겨울 최저 기온은 섭씨 영상 10도에서 9도 정도까지 내려가는데, 높은 습도로 실제 체감 온도는 더 떨어진다.


(3) 국민


1) 인구
2002년 현재 대만의 인구는 2천300만 명을 넘어섰다. 그 가운데 현존하는 대만 원주민은 14개 부족(2008년 2월의 통계에 의하면, 대만 원주민은 모두 494,107명으로, 대만 인구의2.1%를 점유)으로 파악되며, 그들 이외의 대만 사람들은 모두 중국 대륙에서 이주해 온 이른바 한인(漢人)들이다. 그 이주민들 가운데 대다수는 17세기에서 19세기 사이에 중국 대륙 푸지엔성(福建省)과 광동성(廣東省)에서 건너왔다. 이들 가운데 푸지엔성에서 건너온 이른바 민난인(??)이 현재 대만 인구의 약 70%를 차지하여 주류를 이루며, 주로 광동성 북부 및 푸지엔 성 남부 일대에서 건너온 커쟈인(客家人)인도 적지 않다.

2) 언어
대만의 커쟈인이 사용하는 언어는 민난인들이 쓰는 언어와 완전히 다르다. 그 밖에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 일본이 대만에서 물러간 뒤, 중국 대륙 각 지역(省)에서 산발적으로 건너온 한인들이 있다. 그들은 또한 각자 서로 다른 자신들의 지방언어(방언)를 사용했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 각 지역에서 온 첫 세대가 사용했던 지방언어들은 거의 다 사라졌다. 한편 14개의 소수 부족으로 구별되는 원주민은 각기 저들의 모어(母語)를 사용한다. 그리고 사회 전반에 걸쳐 민난어가 널리 사용되며, 커쟈어(Hakka Chinese)도 전통적인 커쟈촌(客家庄)을 중심으로 여전히 사용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대만 사회의 주류를 이루는 민난어 사용자(대만 인구의 약 70 %차지)들이 그들의 모어인 민난어(Fukenese)를 아예 대만어(台語, Taiwanese)라고 주장하는 가운데, 그 언어의 영향력이 점차 확대되고 있는 점이다. 대만의 중화민국 정부는 학교 교육을 통하여 여전히 국가 공용어인 보통화(普通話, Mandarin)를 지속적으로 보급하고 있어, 이곳 사람들은 자신들의 모어 외에도 거의 모두 다 만다린을 능숙하게 사용한다. 시대가 변하고 각종 외래문화가 범람함에도 불구하고, 원주민들은 물론 이처럼 서로 다른 시기에 대만에 건너온 한인들도 저마다 자신의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언어는 물론 주요한 문화유산과 습속을 지켜나가려 힘쓰고 있다.

3) 종교

대만 사람들의 대부분(약 93퍼센트)은 도교(민간 도교)와 불교와 유교의 문화 풍토에서 살아가는데, 특히 유교는 윤리적인 것을 다루는 인생철학으로서 중국 본토와 대만 문화의 기반을 제공하고 있으므로 대부분의 대만 사람들은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든지 간에 유교의 가르침이 내면화 되어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천주교와 개신교 포함) 신자는 4.5퍼센트 정도 되고, 그 밖의 2.5퍼센트는 이슬람과 같은 다른 종교 신앙을 가지고 있다. 이 가운데서 특기할 사항은 대만 원주민들 가운데서64퍼센트 이상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대로 대만 천주교 신자 24만 여명 가운데 원주민 신자가 차지하는 비율(약 10만~12만 정도 추정)이 약 40~50 퍼센트에 이른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4) 문화 및 음식
대만 문화는 중국 본토의 문화와 아주 유사하다. 중국 경극과 그와 유사한 대만 경극은 대만 문화에서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다. 복식, 음악, 연기, 분위기 등 모든 것이 아름답다. 대부분의 중국 음악은 현악기나 피리로 연주되지만 이러한 악기들이 내는 유쾌한 멜로디를 듣기 위해서는 일부러 찾아가야 한다. 그 밖에 일상에서 자주 듣게 되는 것은 상가 집이나 장례 행렬 때 들려 오는 요란한 북소리와 나팔소리와 징 소리 같은 것들이다. 중국 의학, 침술, 기공은 서양의학 체계에 대한 대체의학으로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죽음에 대한 미신에 사로잡힌 대만 사람들은 죽음의 상징인 흰색과 숫자 4를 싫어하며 죽음이나 사고에 대해 절대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죽게 마련이며 사람들이 죽으면 발끝으로 걷는 자세로 창문 밖으로 나간다고 믿는다. 대만 사람들의 장례는 가라오케에서 노래에 흠뻑 취한 밤을 연상시킨다. 즉 장례식에서, 전자 오르간으로 장례음악이 연주되고, 비키니를 입은 여자들이 노래를 하며,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융숭하게 음식을 대접하는데, 이것이 다 체면과 관련이 있다. 관행상 해야 할 바를 다 안 하면 체면을 구기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인간 관계에서 큰 상처를 입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대만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대만을 문화의 지뢰밭으로 여길 수 있다. 대만에서도 중국에서처럼 '체면'을 중요시 한다. 다른 사람들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서 대만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으며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미소와 공손함은 이 사회 구석구석 어디에나 내재한 생활 규범이다.

선물을 주는 것(특히 선물이 유명한 것일 때), 아부, 자기비하, 아첨하는 말은 대만 사람들의 상호관계에서 일상적인 부분에 해당한다. 체면을 유지하는 것과 함께 이런 소소한 것들은, 상대방에게도 마찬가지로 엄청난 호의를 요구하는 상호간의 의무 관계(關係)를 형성하고 있다.

대만 사람들은 먹는 것을 좋아하며 손님에게 요리를 제공하는 것도 좋아한다. 대만의 음식은 베이징(北京)-산똥(山東)음식, 쓰촨(四川)-후난(湖南)음식, 상하이(上海)음식, 광동(廣東)-차오저우(潮州) 음식 등으로 중국만큼이나 다양하다. 대만 사람들은 다양한 해산물요리에 넣는 아열대 향신료와 설탕을 좋아한다. 외식을 할 때는 서로 특이하고 값비싼 요리를 주문한 후 음식값을 전부 계산하려고 경쟁하므로 또 다른 체면치레의 구실이 되곤 한다.

대만 사람들은 외국인이 받아들이기 힘든 재료들(개, 곰 등의 내장 같은 것)을 이용하지만 이것들은 대개 약용으로, 값이 비싸며 이런 음식을 일상적인 식사로 접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특별음식으로는 월병(仲秋節), 춘권(4월), 쌀경단(단오절), 붉은 거북 케익(생일이나 사찰의 행사 때) 등이 있다.


(4) 사회·경제

앞서 언급했듯이1947년2월28일 발생한 이른바 228 대학살 사건과 관련하여 언급한 국민당 정권의 첫 실책에도 불구하고, 쟝지에스가 대만으로 건너와 공식적으로 대만을 접수 한 뒤, 시행한 정책가운데 하나가 토지개혁(토지분배정책)이다. 이른바 경작자가 그 농토를 소유한다(耕者有其田)는 원칙에 따라 당시 대만의 지주들이 소유한 땅을 소작농들에게 분해하는 정책이다. 일찍이 광대한 중국 본토에서는 부패한 지방 관료와 지주들이 결탁이 되어 토지 개혁에 어려움을 겪었던데 반하여, 대만은 작은 섬이라 장악하기 쉬운데다, 일본 식민지에서 해방된 뒤 대만의 지주들과 결탁될 관료세력의 공백이 형성되어, 국민정부는 비교적 쉽게 토지개혁을 시도하고 완료하였다. 이로써 어느 정도 민심을 수습하고 경제를 안정되게 할 수 있었으며, 이에 더하여 당시 대만에 대한 미국의 대대적인 경제 군사 원조가 대만의 국민정부가 정권을 안정시키는데 큰 도움이 됐다. 또한 이 시절 미국의 도움으로 미국식 교육을 받고 양성된 대만의 기술 관료들(Technocrats)이 훗날 대만 경제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쟝지에스를 계승한 그의 아들 쟝징궈 때는 이른바 '국가십대건설계획(國家十大健設計劃)'이라는 대만 경제부흥의 강령(청사진)을 제시하고 그것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오늘날 대만 경제의 주초를 놓았다. 오늘날 대만은 경제, 정치, 사회, 문화 각 방면에 걸쳐서 급속한 전환기에 처해있다. 경제 방면에서 대만은 최근 국제경제의 추세에 따라 저 성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한국 못지않은 고도성장을 이룬 나라였으며, 지금은 중국 대륙과 특별한 무역협정을 체결하여 경제의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산업 형태도 첨단화 되고 있어 갈수록 세계적인 첨단 산업국가로 자리매김 된다. 그런데 걱정스러운 현상들이 경제성장과 더불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것은 급속한 도시화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과 환경오염 현상은 말할 나위 없고, 가정 파괴와 청소년 범죄의 상승, 그리고 마약 사범의 증가 현상과 같은 것이다. 게다가 대만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또 다른 문제는 국내 노동자와 외국 노동자 문제, 고령화에 따른 노인복지와 장애인 복지 및 원주민의 생활향상 등이다.


(5) 정치

정치 방면에 있어서, 앞서 언급했듯이 국민당 정권 아래서 겪은 긴 계엄통치를 끝낸 뒤, 여러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대만의 민주화는 꾸준히 발전하는 과정에 있다. 또한 다당제이나 실제로는 국민당과 민진당을 중심으로 한 양당제가 정착하여 정당정치도 그 틀이 잡혔다. 그리고 앞서 보았듯이 오랜 계엄통치가 20 여 넌 전에 막을 내리고, 역시 20 여 넌 전에 국가 원수인 총통도 처음으로 직선제에 의하여 선출되기 시작했으며, 또한 점차 복지국가를 지향해 가고 있다. 현재 대만에서 첫째가는 정치 의제는 역시 대만 정권과 중국 대륙 정권의 관계이다. 곧 대만 독립 공화국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대륙과 통일의 길로 갈 것인가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이것은 정치 의제일 뿐 아니라, 사회와 국가의 의제이기도 하다. 대만은 실제로 오랫동안 국민당 장기 집권에 따른 계엄 강권 통치 아래서 모든 의제와 경향이 중국본토와의 통일의 길로 나아가도록 유도되었었다. 그런 반면에 대만의 특수한 역사와 사회 문화 배경은 소홀이 취급되었다. 그러나 쟝지에스가 영도했던 국민당 장기집권 계엄통치가 끝난 뒤 오늘에 이르기 까지 대만 사람들은 중화(中華) 전통 문화 안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며, 중국본토와 통일을 이루느냐 아니면 대만의 자주 독립을 이루느냐는 자신의 미래와 관련하여 번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