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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중국 > 선교지 소개

 

1. 중국 교회의 선교 역사

635년 당나라 때에 네스토리아니즘(경교)이 처음으로 전파되었다.

그후 13세기 중엽에 교황청 외교사절이 원나라에 파견되어 관계를 맺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원나라 시기의 천주교는 원나라가 중원에서 밀려나면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1555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가 선교를 위해 광동성 상천도에 도착하였으나 곧 사망하였고, 1583년 마태오 리치 신부가 광동성 성도(省都)인 광저우에 도착하여 1601년 베이징으로 올라가 10년간 선교하면서 중국 선교의 기초를 놓았다. 아편전쟁(1860년) 이후 서양제국주의의 중국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체결한 불평등조약을 통하여 선교의 자유를 얻고자하였던 교회는 중국사회로부터의 배척받기 시작하였다.

특히 19세기 중엽부터 교회와 중국사회 사이의 갈등으로 표출된 교란(敎難:예, 의화단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또한 중국사회의 민족주의 의식 고조와 함께 지식인과 학생을 중심으로 1920년대에 비그리스도교운동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이에 따른 영향으로 교회는 중국사회에 적응하기 위하여 토착화를 모색하였고, 교황청에서는 전례문제에 대한 수용적 태도의 표명 및 중국인 주교 임명 등을 실현하였다.
1949년 공산화 이후, 교황청과 단절되고 외국선교사들이 추방되고 말았다. 무신론을 표방하는 공산당 전제정치 아래에서 교회의 생존을 고심하던 일부 인사들은 공산당과의 타협을 모색하고, 이 노선에 따라 1957년 ‘중국천주교애국회’를 설립한다. 2006년 현재, 중국 가톨릭교회는 신자 수 1,200만 명 이상, 주교 120여 명, 신부 3,000여 명, 여성 수도자 5,000여 명의 교회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13억여 명에 이르는 인구에 비하면 아직도 교세는 미미한 편으로, 중국의 복음화, 나아가 세계의 복음화를 위하여 많은 이들의 기도와 도움이 절실하다고 할 것이다.


홍콩
1841년 홍콩주재 영국군인 사목을 위한 목적으로 마카오 교구로부터 독립하여 감목구로 지정되었다. 1949년 중국이 공산화 되면서, 많은 난민들이 홍콩으로 들어왔고, 그 중에는 신자들과 성직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1997년 7월 1일 홍콩은 약 150년간의 영국식민지 시대를 마감하고 중국으로 반환되어 홍콩특별행정자치구가 되었고, 홍콩의 지역적·경제적인 특수한 상황을 활용하여 중국(대륙)교회가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여러 방면(바티칸과 중국정부 간의 수교문제 등)으로 노력하고 있다.

2. 선교지의 이모저모

(1) 개략적인 역사 : 중국 (대륙)

신화시대를 제외하고 중국의 역사는 하(夏: 존재자체는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유물 등의 직접적인 발굴성과는 없어 논란의 여지가 남아있다), 상(商), 주(周) 세 고대국가의 성립을 그 시작으로 볼 수 있다. 이후 약 550년간의 춘추·전국시대가 지속되어 주나라의 권한이 약화되고 각 제후국이 중국의 통일을 위해 왕국을 자칭하며 서로를 복속시키기 위해 경주하였다. 진(秦)은 중국을 통일하여 이러한 혼란시기를 종식시키고 진왕은 스스로를 시황제라 칭하였다. 그러나 진(秦)은 폭정으로 인한 반란과 유방과 항우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고 뒤이어 중앙집권적 국가인 전한(前漢:기원전 206년-서기 9년)에 의해 통일된다. 전한의 외척 왕망이 황위를 찬탈하여 신(新:9년-23년)을 세웠으나 이 또한 각지의 반란으로 서기 23년에 멸망한다. 이어 후한이 다시 전한의 맥을 이었으나 서기 220년에 망하고 난 뒤 삼국시대와 위진남북조시대라 불리는 혼란기를 거쳐 수(隋:581-617)와 당(唐:618-907)이 중국을 차례로 지배하게 된다.

당의 붕괴 이후 혼란기를 겪고 송(宋:960-1279)에 의해 중국은 70년 만에 다시 통일되었다. 그러나 여진족이 세운 금(金:1115-1234)에 의해 송은 남쪽으로 수도를 옮김으로써 간신히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한편 남송은 쿠빌라이 칸에 의해 세워진 몽골국가 원(元:1271-1368)과 함께 금을 멸망시키기에 이른다. 남송도 원에 의해 1279년 멸망하고 원은 98년간 중국을 지배하나 원 또한 한족에 의해서 세워진 명(明:1368-1644)에 의해 멸망하고 만다. 몇 되지 않았던 한족국가인 명도 만주족에 의해서 세워진 청(淸:1616-1911)에 의해서 중국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근대에 들어서 청은 해외 중상주의(重商主義) 국가들의 압력을 받는 한편 아편전쟁(1839~42)·태평천국운동(1851~64)·청일전쟁(1894~95) 등의 외세의 침략에 국가권력의 보존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러한 가운데에 변법자강운동과 같은 새로운 바람이 일었으나 다시 청을 일으켜 세우기에는 이미 늦었고 의화단사건으로 열강의 군대는 중국에 진주하게 된다.

청은 1911년 붕괴되기에 이르고 쑨원[孫文]에 의해 중화민국이 탄생하였으나 위안스카이(袁世凱)에 의해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복귀하였다가 다시 공화정으로 복귀하는 일이 발생한다. 당시의 중국은 지역 군벌에 의해 분열되어 있었고 이에 국민당과 공산당의 사상· 정치적 분열도 중국을 갈라놓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국민당과 공산당은 서로의 힘을 빌어 화북의 군벌을 일소하고 안정을 찾아갔으나 장제스(蔣介石)는 공산당과 갈라서서 이들을 소탕하고자 하였다. 이에 공산당은 산악지대로 철수하여 스스로의 정부와 군대를 조직하여 국민당에 맞섰다. 그러나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고 1937년 본격적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화민국군과 공산당군은 서로 협력 항일전선을 구축하였다. 2차대전이 일본의 항복으로 종결되자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은 다시 내전(국공내전: 1946년~1949년)을 시작하였고 그 결과 패배한 국민당은 타이완으로 피하였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이 정식으로 선포되었다. 이후 토지개혁법에 의해 토지재분배가 이루어지고 반공·반정부 운동에 대한 ‘반혁명 활동 진압에 관한 지시’로 1953년까지 71만 명의 처형, 129만 명의 체포, 123만 명의 구속, 240만 명의 무장세력의 소탕이 이루어졌으며, ‘삼반운동’의 전개로 관료의 부패를 타파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부패의 책임이 자본가에게도 전가되어 자본가 계급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마오쩌둥(毛澤東)의 지휘 하에 대약진운동을 전개하여 현대화를 가속하고자 인민공사를 추진하였으나 이의 실패로 2천만에서 4천만 명에 이르는 아사자를 만들어내는 등의 문제를 보이자 이 운동의 지지여부에 따른 파벌이 발생하였다. 마오쩌둥은 과격파의 요청을 받아들여 1966년 문화대혁명을 전개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중국 내부의 극단적인 혼란과 폭력이 전국적으로 뒤따랐다. 문화대혁명은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종결되었다.

이후 화궈펑(華國鋒)이 주석직을 이었으나 2년 만에 퇴진하였고 그 뒤를 덩샤오핑(鄧小平)이 승계하여 온건주의적 지도 아래 경제의 현대화에 진력하여 상당한 성과를 내었다. 1989년 경제발전에 걸맞는 정치발전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고 이를 무력으로 진압한 텐안먼(天安門)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 사건으로 잔쩌민(江澤民)이 국가 주요직에 등용되어 1993년 국가 주석직에 오르는 등 최고지도자로 성장하였다.

1990년 9월 제11회 아시아 경기대회를 북경에서 개최하는 한편 텐안먼 사건을 ‘반혁명폭란’에서 ‘정치풍파’로 재평가하는 등의 개방·완화정책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정치적·경제적인 면에서의 중국식 사회주의는 현대에 들어서 높은 경제성장을 이끌어 내고 있다. 1997년 덩샤오핑이 사망하고 같은 해 7월 1일 난징조약으로 영국에 할양된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되었고 1999년 12월에 마카오가 포르투칼에서 중국으로 반환되었다.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라고 불릴 만큼 경제가 급성장하는 한편 2001년 WTO 가입, 2008년 하계 올림픽 대회를 치러냄으로써 강대국으로 도약하고 있다.


(2) 중국의 자연환경


1) 지형
유라시아 대륙의 동부에 위치한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긴 국경(22,117km)을 가진 국가로 세계에서 세 번째로 넓은 국토면적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동부지역은 평야와 저지대로 이루어져 있고, 남서부지역은 티베트 고원(평균해발 4,060m)의 고지대가, 북서부지역은 광범위한 분지가 발달되어 있다. 동부지역의 화베이 평원은 중국 내 다른 어느 지역보다 경지면적의 비율이 높은 편이고 황허(黃河)와 화이허(淮河) 등의 강이 흐르고 있다. 또한 남동부는 평야와 양쯔, 주장(珠江) 등의 큰 강과 평원이 어울려 있는 지역이다. 또한 남서부의 티베트 고원의 서쪽과 남쪽 경계는 히말라야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다. 최고봉은 티베트와 네팔의 경계 부근에 솟아 있는 에베레스트 산이다. 북서부 지역은 타림 분지 티베트 고원의 북쪽에 있고 북쪽에는 톈산 산맥[天山山脈], 서쪽에는 파미르 고원, 남쪽에는 쿤룬 산맥 등 주위가 산지
로 둘러싸여 있다. 56만㎢의 면적에 이르는 이 분지 내에는 세계에서 가장 황폐한 불모지 가운데 하나인 타클라마칸 사막이 있다.

2) 기후
광대한 국토로 인하여 다양한 기후분포를 보인다. 남쪽은 열대성의 기후를 보이고 북쪽으로는 러시아와 내몽골에 인접하여 서늘하고 긴겨울을 가지고 있다. 서쪽의 신장자치구는 건조하고 강수량이 적으며 남동쪽의 해안지역은 온난하고 습윤하여 연평균강우량이 2,000mm 이상이다.

3) 기타
① 천연자원 : 천연자원이 다양하고 풍부하게 활용할 수 있을 정도의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다. 석탄, 철, 금, 석유, 천연가스, 수은, 주석, 텅스텐, 안티몬, 망간, 몰리브덴, 바나듐, 마그네타이트, 알루미늄, 납, 아연, 우라늄, 개발가능한 세계최대수준의 미개발 수력발전관련 자원이 존재한다.
② 동·식물 : 북반구에서 나타나는 자연식생의 모든 유형이 발견되며 남중국해의 해안지역에는 맹그로브 습지가 있고 하이난 섬[海南島]과 윈난 성 남부에는 우림이 있다. 그밖에 열대와 온대 침엽수, 상록활엽수, 낙엽수가 주를 이루는 지역이 있는가 하면 사막·스텝·초지·사바나도 있다.

동물 또한 다양하게 서식 분포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양자강악어, 철갑상어류, 자이언트샐러맨더, 자이언트팬더와 같이 다른 지역에서는 이미 멸종한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기도 하다.


(3) 국민


1) 인종과 인구
2009년도 7월의 공식적인 통계에 의하면 1,338,612,968명에 이르는 인구가 중국에서 살고 있으며 이는 세계에서 단일국가 인구수로는 최다이다.

중국은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족(93%)을 포함 56개 민족이 살고 있다. 소수민족 중 인구가 100만 명 이상인 민족은 좡족(壯族), 몽골족(蒙古族), 조선족(朝鮮族), 티베트족(藏族), 위구르족(維吾爾族), 만주족(滿洲族, 滿族), 후이족(回族) 등 18개 민족이다. 반대로 루오바족(珞巴族) 등 인구가 3천 명 이하인 민족이나, 민족을 구별할 수 없는 73만 명(2000년 시점)의 사람들도 있다. 이들의 거주지는 중국 전 국토의 60% 이상이다. 국내에서 가장 다양한 민족이 거주하는 성(省)은 서남부의 윈난성(雲南省)으로, 35개 민족이 거주하고 있다. 광시 장족자치구에 살고 있는 좡족이 중국 소수민족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들은 주로 벼를 재배하고 애니미즘적인 형태의 종교를 믿고 있다. 투르크계 소수민족인 위구르족은 관개농업을 주로 하고 카자흐족과 키르기스족은 신장자치구 내에 거주하고 있으며 유목생활을 하면서 생활하고 있다. 몽골족은 네이멍구 자치구에 거주하면서 목축과 농작물 재배를 주로 하고 있다.

1949년 이후 중국정부는 한족을 변경지대와 내륙지방으로 이주하도록 장려하였고 이는 지금에 큰 성과로 나타나고 있다. 신장자치구, 네이멍구자치구, 헤이룽장 성, 칭하이 성 등 대부분의 지방 자치구나 지방 성(省)에서의 한인비율이 대부분 절반을 넘어서기에 이르렀다. 중국의 인구분포는 상당이 불균등하다. 중국을 둘로 나누어 보면 동반부에 대부분의 인구가 밀집되어 있으며 서부와 북서부는 이와 대조를 이룬다. 전체 중국의 인구성장률은 0.655%를 나타내고 있으며(2009년도 조사), 사망률은 천 명당 7.03명(2008년도 조사)이 사망하였다. 특이할만한 것은 유아사망률이 굉장히 높다는 것인데 천 명당 평균 20.25명의 유아가 사망하고 그 중 여아가 남아보다 약 3명 정도 수치가 높다. 외국에서 중국으로의 이주는 굉장히 소수로 외국으로 이주하는 중국인이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이주율: 천명 당 -0.39명). 또한 전체 인구의 43%가 도시에 살고 있거나 도시화 되었다(2008년 조사).

2) 언어
중국은 다양한 어족으로 이루어진 국가이다. 물론 93%에 달하는 한족의 비율에 의해서 다양한 방언을 지닌 중국표준어인 보통화(普通話)가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으나 다른 55개의 민족들 중 대다수가 자신의 말을 배우고 학교에서는 보통화를 쓰고 있다. 중국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크게 시노티베트어족·알타이어족·인도유럽어족·오스트로아시아어족으로 나뉘어 질 수 있다. 보통화는 시노티베트어족의 언어이다. 시노티베트어족에 속하는 소수민족들은 대부분 남부와 남서부에 집중되어 있는데 소수민족 중 가장 인구수가 많은 좡족과 티베트에 살고 있는 티베트족들이 대표적이다.

알타이어족 계역의 소수민족은 주로 북서부와 북부에 살고 있으며 투르크계 소수민족과 몽골족이 대표적이다.방언도 다양하여 중국 북부·중부·서부에서 사용하는 관화, 중국 남동부에서 사용하는 우어[吳語], 민 제어[南語]·민베이어[北語], 간어[語], 커자어[客家語], 샹어[湘語], 웨어[語] 등이 있다. 여러 방언들 간의 차이는 주로 발음과 어휘에서 나타난다. 이들 방언 가운데 가장 변화가 심한 곳은 동남부의 여러 성(省)이다. 문화 중심지인 쑤저우[蘇州]의 방언과 상업 중심지인 상하이[上海]의 방언이 포함되는 우 방언은 장쑤 성[江蘇省]의 동남부와 저장성[浙江省]의 대부분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 방언은 7성 또는 8성의 성조가 있는데, 이것은 중고어의 4성이 두자음(頭子音)의 무성·유성에 의해 각각 나뉜 것이다. 이외에도 민난 방언, 커자 방언, 샹 방언, 웨 방언 등 다양한 방언이 존재한다.


3) 중국의 행정구역 및 도시

중화인민공화국 (중국)의 행정구역은 22개의 성 (省), 5개의 자치구 (自治區), 4개의 직할시 (直轄市), 2개의 특별행정구 (特別行政區)로 구성된다. 이 중에서 홍콩, 마카오를 제외한 지역을 중국대륙 (中國大陸 : 중국 본토) 으로 칭한다.



4) 종교
중국은 여러 가지 종교를 지닌 국가인데, 그 중에서 중국 정부에서 공인한 종교를 ‘5대종교’라고 부른다. 천주교, 개신교, 이슬람교, 불교, 도교가 바로 그 종교들이다. 그리고 한족을 제외한 55개 소수민족 안에서 발견되는 믿음행위와 지역적인 민간신앙 등이 있다. 오늘날 중국의 종교 상황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설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공산혁명이 성공하면서 반봉건, 반식민지의 역사가 끝나고, 중국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제도가 뿌리부터 변혁됨으로써 종교 상황 또한 근본적으로 변화하였다. ‘죽의 장막’이라는 표현처럼 사회의 모든 부문이 외국과 단절되었는데, 특히 종교에 있어서는 그 정도가 더 심하였다. 서양제국주의 세력의 일부분으로 인식되었던 천주교와 개신교는 심각한 적대세력으로 간주되었고 공산화 이후 철저한 단절이 이루어졌다. 더구나 문화대혁명이라는 10 년 간의 가혹한 탄압기를 겪으면서 종교의 모습은 심하게 일그러졌고 그 힘은 약해질 대로 약해졌다. 개혁 개방정책 이후 지난 30년 동안 조금씩 회복되고 있지만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다고 하겠다. 또 한 가지 중요한 변화는 중국의 모든 종교는 정부 기구인 “국가종교사무국”의 완전한 통제 아래에 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건설의 성공을 위해 중국정부는 사회 모든 부문의 개방과 변화의 정도를 세밀히 조절하고 있는데, 종교에 대해서는 더욱 민감하고 엄격하다. 종교에 대해 사회주의 건설의 역군으로서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그 운신의 폭을 조절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와 도교 신자가 제일 많고 그 외에 이슬람교가 약 4%(약 4700만)정도이며 천주교, 개신교가 소수를 차지하고 있다. 천주교의 경우 신자 숫자가 약 1,200만 명이며 성당과 공소가 4,600여 곳(1999년 통계)이라고 하지만 이는 당시의 삼자애국협회에 속한 교회의 숫자이고 이 숫자에 가정교회(지하교회)에 속하는 숫자를 더한다면 그 수는 더 많아질 것이지만 그 정확한 통계를 알 수 없다는 점이 특이 할만하다. 1982년 발표된 ‘사회주의 종교법’에 근거, 인민들과의 협조를 위한 공산당원의 종교활동을 인정하는 등 종교활동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으나 ‘삼자정책’에 의해서 선교활동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특히 만 18세 미만의 미성년에 대한 선교활동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으며 위반 시에는 법적 제재를 받게 된다.

* 중국천주교회의 선교역사
635년 당나라때에 네스토리아니즘(경교)이 처음으로 전파되었다.

13세기
13세기 중엽에 교황청 외교사절이 원나라 조정에 파견되어 중국과 가톨릭교회가 관계를 맺기 시작하였다. 특히 1294년 베이징에 도착한 몬테 고르비노 신부는 이후 11년간 선교한 결과 6천여 명이 입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원나라 시기의 천주교는 원나라가 중원에서 밀려나면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16세기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하여 중국에 대한 선교가 다시 시작되었다. 1555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가 광동성 상천도에 도착하였으나 곧 사망하였다. 1580년 마태오 리치 신부가 광저우에 도착하였으며, 그는 1601년 베이징으로 올라가 10년간 선교하며 예수회 중국 선교의 기초를 놓았다.

18세기
로마교황청과 청나라 조정 사이에 전례문제가 발생하였다. 예수회의 적응주의적 방법이 로마교황청과 보수적 수도회와 선교회에 의하여 부정되면서 중국 선교에 큰 어려움이 발생하였다.

19세기 아편전쟁을 시작으로 서양제국주의 세력의 중국에 대한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중국사회에 위기의식이 고조되었다. 서양제국주의 국가가 중국정부에 압력을 행사하여 체결한 불평등조약을 통하여 선교자유를 얻고자하였던 교회에 대하여 중국사회 전반의 거부감이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20세기초 19세기 중엽부터 교회와 중국사회 사이의 갈등의 표출인 교안(교난)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폭력을 동반한 교안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의화단 사건이었다. 이밖에도 중국사회의 민족주의 의식의 고조와 함께 지식인과 학생을 중심으로 20년대에 비그리스도교운동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교안과 비그리스도교운동을 겪으면서 교회는 중국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토착화를 모색하였으며, 그 구체적 표현으로 교황청에서는 전례문제에 대한 수용적 태도의 표명 및 중국인 주교 임명 등을 실현하였다.

1949년 공산화 이후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내전이 공산당의 승리로 끝나면서 반공입장과 국민당지지를 표명한 교회는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교회는 공산당의 반혁명진압운동에 따라 교황청과 단절되고 외국선교사들이 추방되고 말았다. 무신론을 표방하는 공산당 전제정치 아래에서 교회의 생존을 고심하던 교회의 일부 인사들은 공산당과의 타협을 모색하게 된다. 이러한 노선에 따라 1957년 “중국천주교애국회”를 설립하고, 1958년부터는 자선자성원칙을 내세우고 교황청의 승인 없이 주교를 선발, 축성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이러한 애국회의 입장을 반대하며 공산화 이전의 교회 입장을 견지하는 이들도 상당수를 차지하였다.

1978년 개혁 개방 이후 공산당의 전제정치에 대한 태도와 관계없이 모든 신앙인들이 문화대혁명(1966년-1976년) 동안 공식적인 신앙 활동을 전혀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고난의 시기를 통과하며 성령의 도우심에 힘입어 신앙은 더욱 굳세어졌고, 교우 수도 더 늘어났다. 공산당은 10년의 동란을 뒤로하고 개혁개방 정책을 선전하고 있다. 또한 종교 분야에 대하여 “법에 의한 종교관리”를 내세우며 교회에 공식적인 신앙 활동을 제한적으로 허용하였다. 2006년 현재, 중국 가톨릭교회는 교우 수 1,200만 명 이상, 주교 120 여 명, 신부 3,000여 명, 여성 수도자 5,000 여 명의 교회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13억여 명에 이르는 인구에 비하면 아직도 교세는 미미한 형편으로, 중국의 복음화 나아가 세계의 복음화를 위하여 많은 이들의 기도와 도움이 절실하다고 할 것이다.

* 베이징천주교회의 선교역사

1294년 프란치스코회 선교사 몬테고르비노(Giovanni da Montecorvino)가 원나라 수도 베이징에 도착하여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1307년 교황 클레멘스 5세는 베이징을 총주교구로 설정하고 몬테고르비노 신부를 총주교로 승품하였다.
1601년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당시 명나라 수도 북경에서 선교 활동을 재개하면서, 이후 청나라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선교 역사가 이어진다.
1784년 이승훈(李承薰)이 북당에서 그라몽(J. de Grammont, 梁陳材) 신부에게 베드로란 세례명으로 영세하고 귀국하여 한국천주교회 설립을 주도함으로써 한국교회와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된다.

1949년 이후 중국대륙의 공산화, 특히 1966년 이후 10년을 계속한 문화대혁명의 영향으로 심각한 타격을 받았으나, 1978년 중국 정부의 개혁개방 정책을 기점으로 차츰 새로운 발전을 모색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4) 중국의 사회·경제

중국은 개혁·개방정책 실시 이후 자본주의 경제제도를 도입함으로써 경제가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다. 세계무역기구(WTO)의 발표로는, 2003년의 대 중국 직접투자는 535억 달러가 되어 미국을 제치고 실질적으로 세계 최대의 직접투자 수입국이 되었다. 이와 같은 발전은 특히 공업 분야에서 두드러지는데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는 주장 강 삼각주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남동 해안지역, 양쯔 강 하류를 중심으로 하는 동부 해안지역, 베이징·톈진·랴오닝[遼寧] 지역 내에 있는 보하이 만 근처의 세 곳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들 대도시의 발전의 그늘에는 농민과 대도시 지역민 사이의 소득격차의 문제가 남아있다. 특히 산업의 발전을 꾀하기 위해 낮은 임금으로 농촌지역에서 유입시킨 ‘농민공’이 산업구조의 변화와 함께 오고 갈 곳이 없는 잉여 노동력으로 변화되면서 큰 경제적·사회적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다. 2008년 현재 1인당 GDP는 $6,000으로 세계 132위로 나타나고 있다.

1) 농산품
중국은 전체 국토면적의 10%만이 경작이 가능한 지역인데 그나마도 절반 정도의 지역은 관개시설이 충분하지 않으나 점차로 개선되어지고 있다. 중국은 세계 주요 쌀 생산국 중의 하나로 중국 내에서 가장 수확량이 많은 것은 단연 쌀이다. 다른 주요 작물로는 밀·고구마·옥수수·감자·사탕수수·콩·수수·사탕무·종자면·양배추·기장·토마토·평지·땅콩·보리 등도 상당량 재배되고 있다. 목초지는 중국 전체면적의 약 30%에 달한다. 또한 중국은 돼지·닭·달걀의 주요 생산국이며, 상당량의 양·소도 길러 소가죽·양모·비단이 많이 생산된다. 중국은 해양과 민물에서 오랜 어로(漁撈)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어획량의 65%는 태평양에서, 나머지는 내륙 하천에서 잡은 것이다. 그러나 삼림자원은 빈약한 실정으로 전체의 30%정도가 산업용으로 사용되고 나머지는 연료로 사용되고 있어 목재의 일부는 수입하고 있다. 국내에서 벌채되는 목재는 대부분 헤이룽장성, 지린성, 쓰촨성, 윈난성에서 생산된다.

2) 공산품
중국의 전반적인 공업 생산은 매년 10% 이상의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 경제성장과 근대화의 측면에서 공업은 다른 모든 분야를 능가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금속공업과 기계설비 부문은 가장 중점적으로 육성되고 있다. 주요 제조업 분야로는 비료·농약·섬유·정유·선철·식물성기름·원당·플라스틱·전자제품 등이 있다. 또한 정부 당국이 화학산업에 주력하여 화학비료·플라스틱류·합성섬유의 생산이 크게 신장되었는데, 화학산업이 성장한 결과 중국은 질소비료의 세계 주요 생산국이 되었다. 소비재 부문에서는 직물과 의류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중국의 중요한 수출품목이 되고 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컴퓨터·정보통신 분야의 첨단기술을 보유한 외국기업을 적극 유치하면서 산업구조도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자본·기술집약적 산업으로 이동하고 있다.

3) 교통·통신
중국의 철도는 화물수송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모든 철도는 철도부와 지역행정기관을 통해 국가가 통제하고 있다. 중앙정부는 둥베이 지역의 주요 철도망과 만리장성(萬里長城) 안쪽의 대규모 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전에는 교통이 불편했던 일부 농촌지역에 새로 철도를 놓고 있고 고속화 철도가 현재 건설 중에 있다.

간선도로는 정치적·경제적·군사적 중요성을 갖는 국가·성·구 도로, 현이나 공사(公司)에서 운영하며 2차적 중요성을 가진 지방도로, 공장·광산·국영농장·산림관리기구·군대에서 운영하는 특수 목적의 도로들로 이루어져 있다. 10만km가 넘는 내륙수로는 수상운송에 이용되는데 그 대부분이 화중지방과 화남지방에 편중되어 있다. 지류까지 합하면 양쯔 강이 전국 수로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며,수송화물량으로는 하천에 의한 총수송량의 1/3을 차지한다. 여름에 양쯔 강의 수위가 높아지면 강 하구에서 충칭[重慶]까지 최대 5,000t가량의 배가 드나들 수 있다. 중국에서 2번째로 중요한 강인 시장 강에는 1,000t가량의 배가 우저우[梧州]까지 들어간다. 헤이룽 강[黑龍江], 쑹화 강[松花江], 우수리 강은 지류를 합쳐 총연장 2만km의 수로망을 형성하고 있다.

연해항운은 크게 북부 해역과 남부 해역의 두 항해구역으로 나뉜다. 북부 해역은 상하이[上海]를 운항 중심지로 하면서 샤먼[廈門]에서 북쪽으로 북한 국경선까지 이어져 있다. 남부 해역은 광저우를 중심으로 샤먼에서 남쪽으로 베트남 국경선까지 이어져 있다. 19세기 초부터 주요 항구로서 자리잡아온 상하이는 중국 개혁·개방 정책의 상징이 된 도시로 중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날로 커지고 있다.

중국 민간 항공은 주로 항로를 확대하는 것, 베이징과 다른 주요 도시들 및 먼 변경지대, 내륙지방 등과의 연계를 강화하는 것, 경제 부문의 필요성에 비추어 특수 목적의 비행기를 개발하는 것, 대규모 수송기의 수를 늘리는 것 등을 목표로 하고 있다. 1950년대 후반 이전에 이미 개설된 중국과 러시아·북한·몽골·베트남·미얀마를 연결하는 국제항로 외에 중국의 주변국들과 미국·서아시아·유럽·아프리카 등에도 항공 수송로가 잇달아 개설되고 있다.

1949년 직후에는 전신·전화 등의 통신시설이 유선이었으나, 1970년대에는 무선통신의 사용이 증가되었다. 현재는 개인휴대전화가 보편화되어 시골에서도 이를 사용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는 대도시와 지방 간의 격차를 줄이기 위한 조치로 전자제품이나 통신제품을 판매함에 있어서 도서지역에 더 많은 금전적 혜택을 주는 정책이 시행됨으로써 가능하게 되었다. 국토가 넓은 것으로 인한 통신시설의 미비를 만회하기 위해 국가적인 사업으로 이를 진행하고 있으며 가격이 저렴한 개인 통신기기의 보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1980년대에 와서 중국의 통신서비스는 전반적으로 크게 개선되었으며 홍콩의 첨단 통신 시스템에 힘입어 더욱 향상되었다. 1990년대 들어 시장 개방이 가속화되고 사업상의 통신 수요가 급증하면서 통신 산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중국 정부는 2001년 현재 국내총생산(GDP)의 4%인 정보통신산업의 생산액을 2005년까지 7%로 높여 기간산업으로 육성할 계획이다.

국영방송사로는 신화통신이 있는데 중국중앙방송과《인민일보》의 기사를 내보내고 있고《신화일보》와 《신화매일전신》, 《참고신문》, 중국신화방송 등이 있다. 또한 각 지방에는 그 지방의 방송사들이 있고 중국국내의 방송 신호만을 수신할 수 있는 위성안테나로 도서지역에서도 중국 대부분의 지방의 방송을 수신하여 시청할 수 있다. 신문으로는 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관지인《인민일보》가 있으며 이는 중국공산당의 입장, 정책설명, 당의 공보 등을 발표하고 있으며, 영어판과 한국어 서비스를 비롯해 7개의 외국어판을 발행하고 있다. 이 외에 《해방군보》, 《광명일보》, 《공인일보》를 발행하며, 《중국일보》는 외국인들을 위한 영문판 일간지이다. 외국어판 신문으로는 《베이징타임스》가 있다.


3. 홍콩 (중국식 지명은 샹강)

(1) 개략적인 역사

홍콩은 중국 북부의 룽산(龍山)의 석기문화에 영향을 받은 유물이 발견되어 인류의 출현이 신석기시대로 추정된다. 홍콩은 19세기 초에 영국의 불법적인 아편무역과 이로 인한 아편전쟁의 결과로 체결된 난징조약(南京條約)에 따라 영국에 할양되었다. 1860년 제2차 아편전쟁을 통해 영국은 다시 스톤커터스 섬과 구룡반도를 포함한 홍콩 주변의 영토를 추가로 손에 넣었다. 조약상으로는 99년이라고 하였으나 당시의 국제법상으로는 이러한 기간은 영속적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중국에게는 불행이었으나 영국의 점령이후 홍콩은 무역의 중심지로 번성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진주만을 침략하면서 홍콩도 역시 공격을 받았고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었을 때에는 많은 중국 기업인들이 홍콩으로 이주하기도 하였다. 70년대 중·후반에 들어서면서 홍콩은 중국본토로 유입되는 외국인 투자의 주요 공급원이 되었다. 1984년 중국과 영국은 홍콩의 조차기간의 만료를 1997년으로 정하는 조약에 서명을 하고 반환 이후 50년 동안 홍콩 특별행정구역으로서 고유한 법과 자치권을 유지하는 것에 동의하였다. 1997년 7월 1일 드디어 영국의 통치권 아래에 있던 홍콩이 100여 년 만에 중국에 반환되었다.

(2) 홍콩의 자연환경

1) 지형
홍콩은 홍콩 섬과 란타우 섬, 대여산, 구룡반도, 산까이와 그 밖의 260여개의 섬을 가지고 있다. 남북 간의 거리는 약 38킬로미터, 동서간의 거리는 약 56킬로미터에 달한다. 북쪽으로는 광동성의 심천과 인접하고, 서쪽으로는 마카오, 남쪽으로는 남중국해에 면해 있다. 가장 높은 산은 타이모산(太摩山:958m)이고 가장 낮은 지대는 신계지의 북서부지역이다. 란터우섬이 가장 큰 섬이고 두 번째가 홍콩섬으로 많은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 영토의 많은 지역이 개발되지 않은 채 산과 경사지대로 남아있는 편으로, 홍콩섬의 면적 1,100킬로미터 중 25%도 안 되는 426평방만이 개발되었으며, 남은지대의 40%정도가 공원과 개발제한구역으로 되어있다. 홍콩은 지형의 모양이 길고, 불규칙한 해안선이 특징이다.

2) 기후
북위 22도 15분, 동경 114도 10분의 북회귀선상 부근에 자리를 잡고 있는 홍콩은 습한 아열대성 기후로 여름은 습하며 연강우량(2,220㎜)의 절반 이상이 여름에 집중되어 있다. 국지성 폭우와 태풍, 홍수를 통반 하는 계절이 바로 여름이다. 겨울은 쌀쌀하고 건조한 날씨로 변하며 1월의 평균기온은 약 16℃이다. 가장 덥고 추운 기온은 각각 36.1 °C와 0.0 °C이다.
3) 기타
20세기 중반 이후로 홍콩정부는 광범위한 재조림 계획을 입안하여 소나무, 유카리나무, 벵갈나무, 야자나무 등을 조림, 숲지대 일부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다.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지역의 대부분은 열대초본식물과 홍수림 습지로 구성되어 있고 36종의 야생 포유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3) 국민

1) 인종과 인구
홍콩의 인구는 7,055,071(2009년도 7월 조사결과)명이고 남자 평균연령은 41.9세, 여성은 42.6세로 전체평균 42.3세의 평균연령(2009년도 조사결과)을 가지고 있다. 홍콩 주민의 약 97%가 중국인으로 대부분은 광동 성 출신이다. 중국인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주로 필리핀, 인도네시아, 영국, 미국, 포르투갈, 일본 등지의 사람들이다. 홍콩은 평균 인구밀도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편에 속한다(6,400명/㎢). 출생률은 1명의 여성이 평균 1.02명의 아이를 출산하고 있고 100% 도시화된 국민이라는 재미있는 통계를 보이고 있다.

2) 언어
공용어는 중국어 방언인 광동어와 영어이다. 인구의 95.2%가 광동어를 사용하고 있다. 영어를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38.1%로 영국이 통치를 시작한 이래 1974년까지 유일한 공용어였다. 2003년부터 중국 대륙의 표준어인 ‘보통화’ 수업을 장려하는 정책을 피고 있다. 홍콩에서의 글자는 중국대륙과 같이 한자를 간소화한 ‘간체자’가 아니라 ‘번체자’이다.

3) 홍콩의 도시문화
홍콩은 동서양의 문화가 교차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불교·도교적인 사원이나 동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야시장과 같은 문화와 서양식의 바(Bar)나 성당 등 서구문화가 공존하고 있다. 언어 역시 영어와 중국어를 동시에 사용하고 영국에서 중국으로 반환이 되었음에도 서양문화는 이미 홍콩 문화에 깊이 자리하고 있다. 좁은 면적의 영토와 활용도가 낮은 지역적 특성상 주택과 빌딩 등이 건축물들은 대부분 좁고 상당히 높다. 인구밀도가 높은 나라인 만큼 어디를 가나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활기에 차있다. 또한 홍콩은 지역 전체가 면세구로 지정되어 있어서 동서양의 많은 사람들이 홍콩으로 쇼핑을 오고는 한다. 또한 이들을 위한 관광지도 잘 개발되어 있어 자국인과 외국인이 섞여 있는 것을 어디에 가나 볼 수 있다.

4) 종교
홍콩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곳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인구증가와 더불어 불교신자가 급격히 증가하여 전체 인구의 약 90% 정도가 되었다. 그리스도교 인들은 가톨릭, 개신교, 성공회를 합쳐 약 50만 명 정도이고, 약 3만 명 정도의 이슬람교도가 있다. 옛날부터 홍콩은 어업 등 바다에 관련된 생활이 많았으므로 바다와 연관이 있는 신들을 많이 모셨다. 홍콩은 중국에 반환된 이후에도 아직까지 종교적 자유가 보장되어 있어서 1999년 중국대륙에서는 금지된 파룬궁신자들이 활동을 하고 있고, 가톨릭신자들도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으며 선교에 있어서도 자유가 보장된다.

(4) 사회· 경제

홍콩의 경제는 대체로 국제무역에 기반을 둔 서비스 산업으로 인해 유지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대외무역과 관련된 산업은 홍콩경제의 척추를 형성하고 있다. 세계 1·2위를 다투는 거대한 주식시장과 방임경제정책은 홍콩으로 하여금 환태평양의 주요 금융 중심지로서의 위치를 제공하였다. 20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꾸준한 성장으로 1인당 GDP는 아시아 최고수준인 $43,800(2008년 통계)로 세계 14위이다. 화폐의 발행에 있어서 홍콩은 중앙은행이 따로 없어서 2개의 상업은행이 통화를 발행하고 있다.

1) 농산품
농업이 홍콩의 국내총생산(GDP)에 미치는 몫은 매우 작고 대체로 중국본토에서 식량을 들여오고 있다. 과거 홍콩의 주요 농작물이었던 쌀은 수익성이 높은 채소작물로 대체되었고, 예로부터 어업이 발달하여 담수어 양식이나 해양어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2) 공산품
홍콩은 작은 영토가 대부분 도시화되어 공장 등의 제조시설이 차지하는 비율도 매우 적다. 제조업 역시 전체 국내총생산(GDP)에 미치는 영향은 많지 않고 1/10에 불과하다. 또한 중공업보다는 소비재를 생산하는 경공업이 지배적이다. 특히 직물·의류가 수출품의 가장 큰 몫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에 더하여 전기·전자, 시계, 원격통신장비 등이 전체 수출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3) 교통 및 통신
홍콩의 개통된 유선전화 라인은 3,875,000개(2007년 통계)이며, 핸드폰 사용수는 10,550,000(2007년 통계)대로 전체 인구보다 많다. 텔레비전 방송국은 2개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라디오 방송국은 AM6개소, FM10개소를 운영하고 있다. 홍콩의 교통은 매우 발전되어 있으며 복잡하고 정교한 조직을 가지고 있다. 지하철, 페리, 2개의 공항, 택시나 버스 망이 잘 형성되어 있으며 상호연계가 잘되어 있다. 특히 해상무역이 굉장히 발달하여 있어 세계최고의 컨테이너 선적을 위한 부두와 잘 발달한 항만이 도처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