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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캄보디아 > 선교지 소개

 


1. 캄보디아 천주교회의 선교역사

1555년 포루투칼에 의해 선교가 시작된 캄보디아는 1863년 프랑스에 의해 식민지화 되었고, 1866년 수도 프놈펜에 왕의 허가를 받아 성당이 건립되었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많은 베트남 신자들이 캄보디아로 이주했으며,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의 사목대상도 캄보디아인들이 아니라 베트남인들이었고, 모든 성사와 전례는 베트남어로 이루어졌다. 1957년 첫 방인사제가 서품되었고, 1968년 3개의 사목대리구로 분할(프놈펜, 받탐봉, 캄퐁참)되었다. 크메르 루즈(1975년 4월 ~1979년 1월)에 의해 모든 방인 신부와 수녀 그리고 대다수의 신자들이 죽임을 당했고, 모든 교회 건물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1979년 1월 베트남의 침공으로 프놈펜 함락되었고, 이후 10년간 베트남의 통치하에 있게 되며 이 기간 동안 많은 수의 베트남인들(약 100만)이 캄보디아로 이주하였다. 1989년 9월 베트남군이 철수하고, 1990년 4월 4일 종교자유를 얻게 되었다. 현재는 주태국 교황대사가 관할하고 있다.



2. 선교지의 이모저모

(1) 역사

입헌 군주제 밑의 다당 민주주의(Multiparty democracy under a constitutional monarchy)를 채택한 캄보디아는 태국의 서쪽과 남쪽 그리고 베트남의 동쪽과 남동쪽에 접한 남동아시아 대륙에 자리 잡고 있다. 캄보디아는 북동쪽으로는 라오스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또한 태국 걸프와 접한 해안선을 가지고 있다. 또한 북쪽의 당렉(Dangrek)산과 남서쪽의 카다몸(Cardamom)산을 천연적인 국경으로 가지고 있다.
또한 통레 샆(Tonle Sap) 호수와 메콩(Mekong)강 그리고 바삭(Bassac)강을 주요 지형에 포함하고 있다. 캄보디아는 비록 위험한 수준의 계속되는 삼림 파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 국가들 가운데 가장 울창한 삼림을 소유한 나라이기도 하다.


1) 앙코르 와트(Angkor Wat)

기원후 900년부터 1200년 사이 약 3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앙코르(Angkor)의 크메르 왕국은 오늘날의 시엠 레압(Siem Reap)시 근처에 위치한 톤레 샆(Tole Sap) 호수의 북쪽 해안에 세계에서 가장 놀랄만한 건축물을 만들었다. 앙코르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15마일, 남쪽에서 북쪽으로 5마일에 이르고 있다. 앙코르는 72개의 대사찰과 그 밖의 다른 건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수야바르만 2세(Suryavarman Ⅱ)가 1112년부터 1150년 사이에 앙코르의 중심 사찰인 앙코르 와트(Angkor Wat)를 지었다. 각 면의 길이가 거의 1.5마일에 달하는 앙코르 와트는 그 중심답이 신들의 집인 메루(Meru)산을 상징하며, 세상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의 벽들, 해자(垓字), 다양한 형태의 내세 등을 표현하는 힌두의 우주론을 묘사하고 있다. 수도인 앙코르 톰(Thom)은 1177년 샴(Cham)의 약탈 이후에 지어졌으며 300피트의 넓은 해자(垓字)에 둘러싸여 있다. 앙코르 톰의 건축은 힌두사상에서 불교사상으로 바뀌면서 동시에 이루어졌다. 사원은 부처의 형상으로 개조되었고 앙코르 와트는 불교신자들의 중요사원 중의 하나로 되었다.


15세기 샴족의 공격 후 대부분의 앙코르는 버려졌지만 앙코르 와트만은 불교신자들의 순례를 위하여 남겨졌다.
거대한 도시와 사원들은 19세기 프랑스의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장기간의 복구 과정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울창한 숲에 의하여 거대한 은폐물로 남겨져 있었다. 앙코르 구조물과 문화적 유산의 파괴와 황폐화에 대한 깊은 관심이 생기면서 1995년 캄보디아 정부는시엠 맆(Siem Reap) 지역과 앙코르 유적의 고고학적 공원으로서의 가치를 증진시키고 유지, 보수를 담당하고 보호와 관리를 위한 부서를 설립하였다. 1995년 12월 세계문화유산위원회(World Heritage Committee)는 앙코르 유적들을 세계 유산 목록에 영구히 등록함을 확정하였다. 현재 관광산업은 캄보디아 국가경제에서 외화를 벌어들이는 두 번째 소득원이다.
2) 역사 개요
캄보디아에서는 미얀마, 라오스, 태국, 베트남과 비슷한 시대에 인류가 살았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북서 ‘롱 스펜’지방에서 BC 4천년경부터 AD 9세기까지 약 5천년동안 인류가 살았던 흔적이 있다. 동굴과 석기 시대의 도구들과 빗살무늬의 항아리도 발견되었다. 캄보디아의 남동쪽 지방에서는 BC 2세기에서 AD 8세기까지 인류가 살았던 흔적이 있으며, 이 인류는 부족국가의 형태로 분석된다. 중부의 ‘삼롱센’ 지방에서는 기원전 1,500년경에 인류가 살았던 흔적이 있다. 이들은 BC 1,000-500년 사이에 끝이 나고, 중국과 인도문화를 접하면서 10세기까지 지속하게 된다.

AD 1세기 경 바닷가와 계곡에서 집단 거주하면서 벼농사를 위주로 철기문화를 이루고 살던 이들에게 인도와 중국이 나타나게 된 것은 그 당시 중국과 인도의 교역로였던 중앙 아시아 지역에 유랑민족의 습격이 심해지자, 중국은 새로운 인도교역로로 남방해상로를 개척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중국 상인들은 인도에서 배로 벵갈만을 지나 말레이시아 반도의 중간을 육로로 횡단하고, 다시 태국만에서 선박을 이용하여 중국의 남부로 연결하면서, 캄보디아에 외국문명이 스며들기 시작하였다. 이때 중국인의 정착민도 생기기 시작하였다. 처음 인도 문화가 전파되고, 브라마 승려들에 의하여 힌두교가 전파되었다.

3세기경 중국은 메콩 델타 주변에 살던 민족을 ‘후난’으로 불렀는데, 이말은 크메르어인 ‘프남’에서 유래한 것으로써, 지금의 ‘프놈’ 즉 산(언덕)이란 뜻이다. 그 당시 이 지방에 살던 민족들은 ‘몬 크메르’족으로 보인다. 중국은 후난이 전설에 의해 생긴 국가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산스크리트와 크메르 전설에 근거를 둔 것 같다.

AD 초기에서 5세기 경까지 인도문화가 ‘후난’에 큰 영향을 주었고, 힌두교와 불교가 전래하였으며, 산스크리트어를 사용하다가, 지금의 크메르어로 변화하였다. 후난의 멸망에서부터 9세기 초 앙코르시대까지를 앙코르 선사시대로 분류하고 있다. 역사가들은 후난과 첸라국을 크메르문명 이전의 부족국가형태로 정의하기도 하지만 불행하게도 중국의 기록 이외에는 남아있지 않다.

앙코르 시대(9-17세기) : 앙코르 또는 캄부자는 802-1432년 사이에 매우 번성하였던 국가이다. 자야바르만 2세가 자신을 神王으로 칭하면서 앙코르시대가 시작하여 태국(샴국)이 앙코르톰 도시를 점령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태국은 1353년에 앙코르를 일시 점령하지만, 크메르는 이를 다시 탈환하기도 하며 전쟁을 끌었다. 결국 두 나라간의 전쟁은 1431년까지 1세기를 끌다가, 태국이 앙코르 톰 도시를 점령하므로써 크메르는 도읍지를 남으로 옮기게 된다.

1516년-1618년 사이에 ‘롱벡’과 ‘오동’을 잠시 수도로 정했다가,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사이에 잠시 앙코르로 다시 도읍을 옮기기도 했으나, 태국에 다시 밀려 1861년 지금의 ‘프놈펜’으로 도읍을 옮긴다. 이 당시에는 메콩 델타를 이미 베트남에 빼앗겼고, 똔레 삽(Tonle Sap) 호수의 서쪽과 북쪽은 태국이 점령하여, 크메르는 사실상 바다가 없는 나라가 되고 만다.

1863년 프랑스가 캄보디아를 점령하여 식민통치를 할때 ‘바탐방’과 시엠립은 제외되어, 사실상 태국의 지배 하에 있었다.
1907년 태국과 프랑스간의 조약에 의하여 이 지역을 프랑스령으로 함으로써, 간접적으로 국토를 회복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그 후 조약이 흐지부지 되면서 Khao Orah Viharn사원이 있는 동렉(Dangrek)산맥 동쪽지역이 태국과 캄보디아간에 영토 분쟁이 생기게 된다. 그러다가 1962년 국제법원에서 이 지역을 캄보디아 영토로 인정하기는 하였으나, 캄보디아 쪽이 절벽이라 이 사원에 출입을 하려면 태국 땅을 통하여야 하는 이상한 경계가 되어 버렸다. 앙코르의 북동쪽에 있는 반테이 스라이 사원도 역시 태국 땅에 있었으나 1941년에 일본의 중재로 태국과 프랑스 간에 캄보디아 영토로 합의하였다.

프랑스 식민지시대 : 19세기에 들어서 프랑스가 캄보디아를 비롯하여 인도지나 반도를 점령하게 되는데, 그로 인하여 ‘시암’ 족 및 ‘챰’족 등의 침략에 의한 국토손실은 더 이상 없었다. 1863년 캄보디아는 프랑스와 신탁통치 조약을 맺게 되며, 1884년에 프랑스는 왕의 권한을 대폭 제한시켜 버린다. 국민의 노예화와 국토의 식민지화가 심화되고 왕은 상징적일 뿐이었으며 프랑스군의 총독이 통치를 맡았다. 프랑스는 왕위의 계승도 간섭하였으며 과세를 중과하고 세금을 납부할 수 없는 국민은 1년에 3개월의 강제노동으로 갸름하게 하였다.
70년에 걸친 식민지 통치 기간 중 물론 저항도 상당히 많았다. 1941년 총독은 지금의 노로돔 시아누크 왕자를 왕으로 책봉한다. 그리하여 노로돔 시아누크 왕이 탄생하게 된다. 시아누크 왕자는 1922년 프놈펜에서 출생하여 사이공에서 공부하기도 하였다. 프랑스는 시아누크 왕자가 친 프랑스파가 되리라고 믿었으나 1945년 3월, 일본의 패전이 가까워지자 일본에 대해 독립을 선언하고 투쟁을 시작하여 종전이 된 후 1946년 초 프랑스군이 다시 진군하자 발언을 높이어 캄보디아의 자주권과 정당 결성권의 인정을 받아낸다. 당시 프랑스는 베트남에서 공산 베트남과 전쟁 중이었으며 한편으로는 캄보디아의 독립운동도 막아야 하는 부담을 지게 되었다. 1952년-1953년 사이에 베트남 북서쪽 산악지방인 디엔 비엔 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베트남군에 대패하게 되고 그 부산물로 캄보디아도 완전 독립할 수 있게 된다.
1955년 4월 시아누크 왕은 부왕으로부터 정식 왕위계승을 받는다. 그는 사회주의 정당인 상쿰 당을 결성하고 당 총재직을 맡으며 1955년 선거에서 상쿰당이 승리하자 자신을 연방정부 수령 및 국가 주석으로 호칭하게 하였으며 그 이후 아직까지 대다수 국민들은 그를 민족의 아버지로 부르고 있다.

1960년 중반에 가서 사회주의체제의 고수와 월맹과의 관계가 깊어지자 미국과의 관계가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결국 미국으로부터의 원조가 중단되면서 국민들의 생활이 어렵게 되고 경제발전이 둔화되자 국민들의 불만이 커지면서 시아누크의 위치가 약화된다. 국민들의 일부는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공산당에 동조하게 되고 크메르 루즈는 계속해서 반 시아누크 운동을 전개한다.

1970년 3월 22일 소련을 공식 방문 중이던 시아누크 왕은 미국에서 잘 훈련받은 직업군인인 론놀의 쿠테타에 의해 정권을 빼앗기게 되고 그때부터 중국과 북한을 떠도는 망명 생활이 시작된다. 론놀은 크메르 공화국을 수립하고 왕정제도를 폐지한다. 그리고 친왕파와 공산주의자들을 대거 검거, 처형함으로써 국민들의 인심을 잃는다. 이에 대항하여 북경에서 망명 중이던 시아누크 왕은 중국의 비호 아래 한때 정적이었던 크메르 루즈와 동맹을 맺고 론놀정권에 대항한다. 론놀을 지원하던 미국은 1973년 베트남 철수 직전에 캄보디아 전역에 걸쳐 크메르 루즈 거점과 월맹군 거점에 대규모 폭격을 감행하였고, 이때 민간인도 15만 명 이상이 죽었다고 한다. 이 폭격으로 인해 캄보디아 국민들은 미국에 대해 적개심을 가지게 되고 친미적이면서 극도로 부패한 론놀정권 보다 크메르 루즈 쪽에 가담하는 자가 많았다. 월맹과 중국의 지원으로 잘 훈련된 크메르 루즈군은 론놀과 그 추종자들을 수도 프놈펜으로 몰아넣었고 프놈펜은 피난민으로 인구가 한때 250만명을 넘었다.

1975년 4월 17일 남베트남 패망 13일 전에 미국이 베트남에서의 철수작전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크메르 루즈군은 총공세를 펴서 프놈펜을 함락시킨다. 폴포트는 국호를 민주 캄푸치아로 바꾸었으며 이때부터 캄보디아 역사상 가장 불운했던 시절이 시작되었다. 세계 최대규모의 주민 소개 계획이 진행되었고 프놈펜의 모든 거주자가 지방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이후 4년 간의 폴포트 통치기간 중 전 국민의 1/3가량이 되는 약 200만명이 고문, 처형, 중노동, 질병, 기아 등에 의하여 죽었다. 교육을 받은 적이 있는 사람들은 학생까지 포함하여 모두 처형되었으며 국내에 있는 외국인들도 거의 간첩혐의로 처형되었다. 안경을 썼거나 손바닥에 못이 박히지 않은 사람들은 부르조아지로 분류, 처형하고 외국책을 가지고 있거나 양담배를 피우던 사람들은 간첩으로 처형하였으며 동맹군이었던 월맹군 중 캄보디아에 남아있던 월남인들도 간첩으로 처형해 버렸다. 이 학살로 인하여 오늘날까지 캄보디아에는 전문인력과 지식인이 부족한 상태이며 국가공무원, 고급 군인들 중에는 베트남의 캄보디아 점령기간 동안 국적을 캄보디아로 바꾼 베트남인들도 많이 있다. 이 학살의 주범은 물론 폴포트였는데 그는 1949년 전기학을 배우기위해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갔으나 성적이 좋지 못하여 졸업을 하지 못하고 대신 공산주의 이론을 배우고 귀국하였다. 1979년 유엔 인권위원회는 이 학살 사건을 나치 이 후 가장 잔인한 학살 행위로 규정하였다.

1978년 12월 건기가 시작되고 2개월 쯤 지나 땅이 마르자 베트남은 크메르 루즈에서 이탈하여 베트남으로 망명한 행 삼린, 훈센 등 현재 캄보디아 정부의 주요 인물들을 앞세우고 대대적으로 캄보디아 침공을 시작하여 불과 1개월 만인 1979년 1월 프놈펜을 함락하고 크메르 루즈군을 밀림 속으로 몰아냈다. 공산 베트남에 의해 수립된 ‘캄보디아 인민공화국’은 행 살린 당 총비서가 통치하게 된다. 베트남의 점령기간 동안에는 소련과 동구권 국가들이 많이 원조를 해 주었다. 국제적인 압력에 의하여 1989년 9월 베트남군은 10년 8개월 만에 캄보디아에서 철수하게 되는데 점령 기간 동안 평균 10만명의 병력을 상주시켰다. 1991년 11월 14일 시아누크 왕은 프놈펜으로 돌아왔다. 시아누크는 캄보디아 상원국회에 의하여 중립내각 의장직을 맡게 된다. 1993년 캄보디아 주둔 임시 UN통치단의 감시 아래 총선을 실시하였고 라나릿드 왕자와 훈센이 공동 수상직을 맡아 연립정부를 구성한다. 1999년 캄보디아는 1863년 프랑스 침공 이래 136년 만에 처음으로 내전도 끝나고 침략도 없는 평화로운 나라로 새로 시작되었다. 주변국들도 이제는 이 나라를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하여 ASEAN회원국 가입을 허락한다. 그 동안 보류되었던 원조 자금들이 1999년 후반부터 들어오기 시작하고, 풍부한 지하자원과 광활한 영농지를 가진 이 나라는 민주주의와 자유시장 개방정책으로 빠른 성장을 기대하고 있다.


(2) 자연환경


1) 지형
① 국토 : 181,040 ㎢
② 도시 : 수도-프놈펜(Phnom Penh:인구 약 130만명)
바탐방(Battambang), 시엠 레압(Siem Reap), 시아누크빌(Sihanoukville), 프레이 벵(Prey Veng), 꼼퐁참(Kompong Cham)
③ 지형(Terrain) : 톤레 샆(the Tonle Sap-Great Lake)과 메콩강(Mekong) 그리고 바삭(Bassac)강으로부터 형성된 중앙지역의 평야와 태국 국경을 따라 남서쪽(카다몬산-Cardamon Mt.)과 북쪽(당렉산-Dangrek Mt.)의 산악지대와 강들과 호수 부근으로부터 형성되는 삼림지대가 있다.
④ 기후 : 6월-10월까지의 우기와 11월-5월까지 이어지는 건기로 나타나는 열대몬순 기후(Tropical Monsoon)이다.

(3) 국민

① 인구 : 약 일천삼백사십만명 (2008년 현재)
② 연평균 인구 증가율 : 1.54% (2008년 현재)
③ 유아사망율 : 58명/1,000명
④ 평균수명 : 남-59세, 여-63세
⑤ 인종 : 캄보디아인-90% ; 베트남인-5% ; 중국인-1% ; 기타 4% ; 그 외에 소수 산악민족, 샴족(Cham), 라오족(Lao)
⑥ 종교 : 소승불교 95% ; 이슬람; 정령신앙; 그리스도교
⑦ 언어 : 공식언어로는 인구의 95% 이상이 사용하는 크메르어이다. 그 외에 지방에서는 프랑스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영어는 제2의 언어로서 점차 사용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⑧ 교육 : 9년 동안의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교육대상 연령 가운데 초등학교에 재적하는 비율은 92.2%, 7학년부터 9학년까지는 34%, 10학년부터 12학년까지는 13%, 그 이상(tertiary)은 7%로 나타나고 있다. 각 학교 등급별로 재적학생들이 그 학교를 완전히 마치는 비율은 초등학교: 48%, 중학교(lower secondary): 21%,
고등학교(upper secondary): 9%, 대학교: 6% 등이다. 문맹률은 26%로 남성의 85%와 여성의 64%가 글을 읽거나 쓸 수 있고,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비율은 인구의 약 15%가 넘는다.


(3) 사회경제

1) 경제 : GDP- 11,200,000 달러(2008년 현재), 일인당 GDP- 723 달러(2008년 현재), 년 성장률-6.5%(2008년 현재), 인플레이션-19.7%(2008년 현재)
2) 천연자원 : 목재, 보석의 원석, 철강, 망간 황, 메콩강으로부터의 수력발전, 알려지지 않은 원유와 가스와 보크사이트(알루미늄의 원광)
3) 농산물 : 2007년 현재 GDP의 29%가 농산물에서 얻어지는 현실이며 약4,848,000헥타아르가 농경지이다. 이 농경지는 모두 관개농경지이며 2,500,000헥타아르는 개간된 농경지이다. 농산물로는 쌀, 고무, 옥수수, 육류, 야채, 유제품, 설탕, 밀가루 등이다.
4) 공산물 : 2007년 현재 GDP의 27%가 공산물에서 발생했으며 의류, 신발 산업과 쌀, 담배, 어업, 목재와 목재 가공제품, 텍스타일, 시멘트, 고무생산품, 종이와 음식 가공품 등이다.
5) 서비스산업 : 2007년 GDP의 39%를 차지하며 관광, 통신, 운송 그리고 건설업등이다.
6) 기타:
① 중앙정부예산 : 세입-814백만 달러;세출-973백만 달러; 외자-213백만 달러
② 무역 : * 수출-2007년 현재 41억달러(4.1billion);의류, 신발, 담배, 천연고무, 쌀, 종이, 목재, 어류
- 주요 수출국; 미국, 독일, 영국, 싱가포르, 일본, 베트남
* 수입-2007년 현재 54억달러(5.4billion);연료, 담배, 차량, 소비재, 기계류
- 주요 수입국; 태국, 싱가포르, 중국, 홍콩, 베트남, 대만, 미국
③ 경제원조 : 2007년 1년 동안 698,200,000달러($698.2million)를 아시아계발은행(Asian Development Bank:ADB),UN계발계획(UNDevelopment Program-UNDP), 세계은행(World Bank),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 카나다, 호주, 중국, 덴마크, EU,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일본, 스웨덴, 태국, 영국 미국 등에서 원조를 받았다.
④ 주요 외국투자국: 한국, 중국, 러시아, 태국, 미국, 베트남
⑤ 환율 : 2007년 현재 미화 $1 vs 4,006 ri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