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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잠비크


모잠비크 > 선교지 소개

 


1. 모잠비크 천주교회의 선교역사

1498년 3월 11일에 포루투칼인 바스코 다 가마가 몇몇 수사 신부들과 함께 인도를 향해 가던 중, 성 조르즈(Sao Jorge)섬에 도착하였고, 그 후 모잠비크 땅에서 첫 번째 미사를 봉헌하였다. 1560년 예수회에서 선교사제들을 파견하였지만, 18세기에 이르러 여러 가지 정치적인 이유로 선교활동이 약화되었다. 1885년 베르링 회의 이후에, 포르투칼 정부는 식민지화에 중점을 두면서 선교에 더 많은 관심을 표명하였고, 이러한 목적과 함께 여러 선교회들에게 모잠비크를 개방하였다. 1910년 10월 5일, 포르투칼이 공화정을 선포하면서 모잠비크 선교는 새로운 어려움에 직면한다. 정부는 가톨릭 공동체를 해산시키고 교회의 재산을 국유화 했다.

1926년 당시 모잠비크에는 약 4만 명의 가톨릭 신자가 있었고, 포르투칼, 인도, 이탈리아 등에서 선교사들이 들어와 활동하고 있었다.

한국외방선교회 신부들이 선교활동을 하는 리칭가 교구는 1963년 7월 21일 교황 바울로 6세의 교서(Decernimus nostra auctoritate)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성 요셉을 주보성인으로 하고 있는 주교좌 성당이 세워졌고, 1964년 12월에 에우꼬리 디아스 노궤이라가 첫 주교로 성성되었다. 대부분이 이슬람교도인 모잠비크에는 소수의 그리스도교(가톨릭, 개신교)가 있고, 꼰솔라따 소속 선교사제들을 포함하여 20여명의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방인사제는 10여명에 불과하다.


2. 선교지의 이모저모

아프간 사냥개가 거꾸로 있는 것 같은 모습의 모잠비크는 아프리카 남동 해안에 2500km에 걸쳐 길게 형성되어 있다. 북으로는 탄자니아, 북서쪽에는 말라위와 잠비아, 서쪽으로는 짐바브웨, 남서쪽으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스와질랜드 등과 국경이 접해 있다.
모잠비크 해협 건너편 정동향으로 400km 지점에 마다가스카르 섬이 있다.

- 면적: 799,379 sq km(한반도 면적의 약 3.6배)
- 인구: 19,687,000
- 수도: 마푸토(Maputo)
- 인종: 반투어 아프리카인(99%): 마쿠아(Makua), 쇼나(Shona), 말라위(Malawi), 야오(Yao), 춍가(Tsonga)
- 언어: 포르투칼어(공식언어), 토속어
- 정식국가명: 모잠비크 공화국(Republic of Mozambique)


(1) 역사

2만 년 전 모잠비크에는 원시인들이 살았으며 적어도 1000년 동안은 Homo Sapiens 정착 생활을 영위했던 곳이다. 약 2000년 전 반투족은 그들의 철기문화를 가지고 이 해안 지역으로 이주해 오기 시작했다.그들은 이곳에 무역항을 만들고 다른 아프리카 지역과 중동부 인도를 잇는 역할을 했는데 이 항구에서 아랍인들의 영향력은 아주 컸다.
3, 4세기경부터 반투계의 아프리카 인종이 북방으로부터 남하하여 현재 모잠비크의 위치에 정착을 시작했다. 그 후 10세기경에는 아랍이나 스와힐리계의 상인과 농업산품을 중심으로 교역이 번창하게 되었다.
14, 15세기에는 쇼나족에 의해 짐바브웨로부터 모잠비크에 걸친 대제국이 창설되어 금을 중심으로 광물자원 교역이 아랍인과의 사이에서 행해지고, 그 융성이 극에 달했다. 15세기 후반에는 모잠비크 북부와 중부의 해안선에 아랍인이 완전히 정착했다. 15세기 말에는 포르투갈인이 서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모잠비크를 방문했다.
1498년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인도양을 항해한 이후로 서양 열강들의 아프리카 진출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은 16세기 초에 모잠비크 섬과 소팔라(Sofala)라는 항구도시를 점령했고, 1530년대까지 소규모 포르투갈인들이 모잠비크 영토로 들어오게 된다. 그들은 잠베지(Zambezi) 강 근처의 떼떼(Tete)와 세나(Sena)에 무역근거지를 만들고 금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얻으려고 하였다.
16세기에 포르투갈인들은 노예무역을 개시하고 식민지 활동을 본격화하면서 아랍인을 몰아내고 내륙부에 세력을 점점 넓혀 나갔다.
포르투갈은 아랍의 모노마타파 제국의 쇠퇴로 통합되면서 17세기 초에는 모잠비크 전 영토에 걸쳐서 지배권을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포르투갈 정부는 포르투갈인의 이주를 적극적으로 추진, 그들에게 대농원주(프라자로)로서의 지위를 주었다. 포르투갈인 농원주는 아프리카인을 노동자로서 사용하면서 무거운 세금을 내고 노예시장을 번성하게 하는 것으로 많은 아프리카인, 특히 북부의 마콘데족이나 남부의 춍가족으로부터 강한 저항을 받았다. 그러나 모두 진압되어 일방적으로 그리스도교와 포르투갈 문화의 보급을 진행하는 것으로 포르투갈의 안정된 식민지 경영이 이어졌다.19세기 말에는 유럽 열강에 의한 아프리카 분할은 종식되고 포르투갈은 영국 및 독일과의 사이에서 현재의 국경을 확정했다. 이후 포르투갈 정부는 프라자로에 의한 대농원 경영을 바꾸어 상업개발 등에 관한 특권을 3대 회사(모잠비크 회사, 니아사 회사, 잠베지아 회사)에 주고 식민지로서 모잠비크 북부와 중부의 경제 개발을 진행하도록 했다. 그러나 3대 회사의 아프리카인에 대한 강권적 지배가 강한 저항운동을 불러 일으켰다. 한편 포르투갈은 모잠비크 남부의 경제개발을 도모하기 위해 남아프리카 공화국과의 관계를 강화하였다. 당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트란스발 지방에서 산출되는 금의 반출 때문에 철도가 로렌시마르게스 항(현재의 마푸토)까지 건설되었고, 매년 8만 명이상의 아프리카인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광산 노동자로서 제공했다. 1932년에서 1968년까지 모잠비크는 기근에 허덕이게 되었다. 포르투갈이 현금화할 수 있는 모든 식량을 몰수해 버렸기 때문이다. 포르투갈은 모잠비크의 자연자원만을 탐닉했을 뿐 사회적 투자나 경제 활동은 전혀 도와주지 않았다. 모잠비크는 식민지하에서 갈수록 황폐해져갔으며 몇몇 병원과 학교는 한정된 수의 백인과 포르투갈인에게만 특권이 주어졌었다.
1951년 포르투갈은 모잠비크를 식민지로부터 해외주(海外州)로 정치적 지위를 변경하는 취지의 선언을 했지만 포르투갈의 식민지 경영을 한층 강화하게 할 뿐이었다. 1960년 포르투갈 군대는 평화적이 집회에도 발포해 600여명의 사망자를 냈다. 이것을 도화선으로 하여 독립의 기운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모잠비크 독립을 목표로 해방운동 조직이 로데지아, 케냐, 말라위에서 결성되었다.
1962년 미국의 시라큐즈 대학교수인 에콰르도 몬드라네(Ecuardo Mondlane)의 밑으로 3개의 조직이 통합되어 모잠비크 해방전선(Frelimo)이 탄자니아에서 태어났다. 1964년 해방전선인 프렐리모(Frelimo)는 포르투갈에 무력투쟁을 개시하고 포르투갈과의 장기적인 식민지해방투쟁에의 길을 열었다.
1969년 프렐리모 의장인 몬드라네가 작은 폭탄에 의해 암살당했지만 사모라 마셸(Samora Machel)이 뒤를 이어 프렐리모의 세력은 북부로부터 남부에 걸쳐 점차로 광대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74년 4월 25일 포르투갈 본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식민지 해방의 방침을 가진 사회주의 정권이 등장하고, 같은 해 9월 7일 포르투갈과 프렐리모 사이에서 독립에 관한 루사카 협정이 체결되었다.
1975년 6월 25일 모잠비크는 모잠비크 인민공화국으로 정식 독립하게 되고, 마셸이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며 수도의 이름은 로렌시마르게스에서 마푸토(Maputo)로 개명되었다. 독립 후, 프렐리모당은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표방하고 일당 독재에 의한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추진했지만 독립 직후부터 백인 이주자를 주체로 하는 모잠비크 국민저항운동 레나모(Renamo : MNR)가 사회주의정권 타도를 향해 게릴라 활동을 개시하여 내전에 휩쓸리게 되었다. 레나모(MNR)의 배후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부가 자금과 무기의 원조를 했고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부의 모잠비크 불안정화 공작도 심해지게 되었다.
1984년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소코마티 협정(불가침조약)을 맺어 내전의 종결을 향해 일보 내딛었다. 또 IMF, 세계은행에의 가입이 허락되면서 파탄상태였던 경제활동의 회복을 도모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모잠비크 정부의 생각과는 달리 레나모(MNR)의 게릴라활동은 끊임없이 국민의 생활을 위협하며 계속되었다. 1986년 항공기 사고로 사망한 마셸을 이은 시사노(Joao Alberto Chissano) 대통령은 사회주의 노선을 버리고 시장경제의 도입을 도모하는 한편, 적극적인 민주화를 추진하게 된다.
1990년 시사노 대통령은 MNR과의 내전 중 같은 해 7월에 양자 간의 직접 교섭을 개시하고 평화의 실현을 향해 노력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1992년 레나모(MNR)와의 정전협상 성공, 11월에는 민주주의적 신헌법을 도입하고 국가재건을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2) 자연환경

1) 지형
남쪽에서 시작되는 해안가의 낮은 지형은 국토의 중간을 가르는 커다란 잠베지(Zambezi)강까지 이어지며, 동쪽 해안의 낮은 지역은 모잠비크 지형학적 특색을 잘 드러내고 있다. 국토 전체를 걸쳐 지형은 서쪽에서 해안가인 동쪽까지 기울어져 있는 형태이다. 국토 중앙과 북쪽으로는 높은 평원지대가 있고 말라위와 잠비아와 국경을 이루는 북서쪽에는 산악지역이 분포해 있다. 모잠비크에서 가장 큰 산인 빙가(Binga)산은 해발 2,436미터로 치모이오(Chimoio) 고산지대에 위치해 있다. 북쪽에 위치한 나물리(Namuli)산은 해발 2,419미터로 모잠비크 고산지대에 위치해 있다.

2) 기후
모잠비크는 열대성 기후를 갖고 있는데, 해안가 지역은 인도양 몬순 기후의 영향을 받아 계절의 변화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기온과 습도가 높은 북쪽의 고산지대, 서쪽 국경지대, 그리고 북동쪽의 구루에(Gurue) 지역을 제외하고 기후는 열대성이다. 평균기온은 섭씨 20도 정도이고 10월과 2월 사이에는 가장 높은 기온을, 6, 7월에는 가장 낮은 기온을 보인다.
잠베지 계곡과 북동쪽 해안가는 섭씨 10도 정도의 낮고 서늘한 기온을 보인다. 습도와 강수량은 지역에 따라 많이 다른데, 특히 북쪽과 남쪽의 차이가 크다. 잠베지 강 북쪽 지역과 쉬어(Shire)강 계곡의 동쪽 지역, 그리고 남쪽의 해안지대는 덥고 습하다. 반면에 남쪽 내륙과 쉬어강 서쪽의 잠베지 계곡 대부분은 건조하다. 강수량은 북쪽과 쉬어강의 동쪽 중앙 지역이 최고를 보인다(1,010mm에서 1,780mm 사이). 평균 강수량이 1,780mm로 최고인 지역은 고원지대와 킬리마네(Quelimane)와 베이라(Beira)의 해안지대이다.


(3) 국민

1) 인종과 가족제도
모잠비크의 인종은 다양하지만, 유동적이며 식민지 역사를 반영한다. 이 지역 인종으로는 마쿠아-롬웨(Makua-Lomwe), 춍가(Tsonga), 세나(Sena), 은다우(Ndau, Shona족의 일종), 쇼피(Chopi), 쉐와(Chewa), 야오(Yao), 마콘데(Makonde), 은고니(Ngoni) 등이 있다.

북쪽으로는 모계적 원칙을 따라 사는 종족들이 있고 남쪽으로는 부계사회를 따르는 종족들이 분포해 있다. 모계사회에서 모계쪽 원로가 권위를 갖는 반면, 부계사회에서는 부계쪽 원로가 권위를 갖는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많은 모계종족이 부계제도나 남성씨족제도 등을 채택해 가정에서 모계쪽보다 부계쪽의 권위가 더 존중되고 있는 중이다.

2) 언어
공식언어인 포르투갈어를 아주 적은 인구가 사용하고 있지만, 국민의 2/5정도는 프랑스어도 사용하고 있다. 포르투갈어는 마푸토와 다른 도시들에 강하게 집중되어 있다. 모잠비크 부족어는 니그로-콩고(Niger-Congo) 어족의 반투어족으로부터 나왔으며, 반투어족(語族)으로는 마쿠아(Makua), 롬웨(Lomwe), 춍가(Tsonga), 세나(Sena), 쇼나(Shona), 슈아보(Chuabo) 등이 있다. 이들 언어는 인접한 주변의 국가의 부족들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유럽어는 수도인 마푸토와 킬리마네, 나칼라(Nacala), 펨바(Pemba) 등의 도시 지역에서 주로 사용되고 있다. 마쿠아와 롬웨는 인구의 거의 반 정도가 사용하고 있으며 모잠비크의 북동쪽에 주로 분포되어 있다.

3) 종교
1975년 독립에 앞서 인구의 거의 1/3이 그리스도교이었고, 이슬람은 극소수였다. 식민지 시대에는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국토 전 지역에 걸쳐 역동적으로 활동했으며, 1926년 이후 로마 가톨릭 교회가 정부에 지원을 제공함으로써 교육과 선교사업에 독점적 위치를 확보했다. 포르투갈이 개신교를 여전히 미심쩍어했지만, 개신교 선교사들은 북쪽 내륙과 인함바네(Inhambane)와 마푸토에서 의료시설과 교육사업을 중심으로 활동을 펼쳤다.

독립 이후 프렐리모에 의해 설립된 정부는 종교에 대해 반감을 표시했다. 자유롭고 개방된 종교정책을 견지했음에도 불구하고 20,000명 이상의 여호와 증인을 박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대 말 프렐리모가 그 정책을 바꾸게 되자 종교단체들이 중요한 세력으로 재출현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인구의 반 정도가 전통종교를 가지고 있지만, 인구의 약 2/5 정도가 그리스도교이고, 약 1/5은 이슬람이다. 이슬람 공동체는 대부분의 모잠비크 도시들에서 발견되기도 하지만, 이슬람교도들은 주로 루리오(Lurio)와 로부마(Rovuma) 강 사이의 북쪽 해안 지역에서 주로 살고 있다.

4) 문화, 음식, 주거형태
모잠비크는 다양한 문화와 언어를 보여준다. 또한 주변국인 남아프리카공화국, 짐바브웨, 잠비아, 말라위, 탄자니아와도 문화적 전통을 공유하고 있다. 다양한 언어, 사회적 관계, 예술적 전통, 의복, 장식유형은 시, 노래, 춤, 행위예술에 있어서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문화적 표현의 주제가 된다.나무 조각상, 북쪽 모잠비크와 탄자니아의 마피코(Mapiko) 성년식 때 쓰는 마콘데(Makonde)족의 마스크는 잘 알려진 예술적 전통들이다.민족 중심이 아닌 지역 중심의 문화 전통은 아프리카 문화유산을 강조하고 사회주의 노선에 따라 사회를 재구성하려는 프렐리모(Frelimo)의 정책으로 인해 위기를 맞았다. 프렐리모는 일부다처제와 다양한 성년예식들, 부족 내의 부족장들과 같은 전통적 문화들을 반대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프렐리모는 일부다처제와 성년식 등을 반대하는 캠페인들을 포기했고, 그러한 사회적 관습들을 억제하기가 힘들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지금까지도 부족장 제도와 지역적 통치제도는 아직까지 광범위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음식은 주로 소스가 곁들여진 카사바(cassava)나 마사(massa), 즉 옥수수 떡이다. 때로는 새우나 육류가 곁들여지기도 하지만, 지역마다 차이가 크다. 쌀도 역시 주요한 주식인데, 종종 콩을 곁들여 먹는다. 삐리삐리(piri-piri)라고 불리는 칠리 소스나 매리네이드(marinade) 등이 음식의 주요 소스가 되기도 한다. 과일로는 주로 망고나 파파야 등이 있다. 모잠비크는 농경사회로 노동자의 4/5이상이 농업에 종사한다. 이들은 루리오(Lurio)강이나 리고냐(Ligonha)강의 계곡과 같은 농사짓기 좋은 토양이나 기후에 밀집되어 살며, 대부분은 가정 중심의 정착생활을 하며 산촌형식으로 생활한다. 독립이후 정부가 집촌형태의 주거생활을 강하게 권장하고 밀집된 마을 중심의 대규모 농장을 장려했으나, 다시 산촌형태의 주거생활이 출현했고, 이는 정부가 사회기반 시설이나 치안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게 만드는 원인이기도 하다. 마푸토가 수도로서 제1도시이고, 다음으로는 마톨라(Matola), 베이라(Beira), 남풀라(Nampula), 킬리마네(Quelimane), 나칼라(Nacala), 테테(Tete), 치모이오(Chimoio) 등이 있다. 이들 대부분은 항구이고 교통과 통신의 중심점이다.


(3) 사회경제

1) 농산품
농업이 경제의 중심이라고 해도 남아공으로부터의 이주노동자들, 관광수입, 국가의 철도 및 항만시설은 외화벌이의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이들 수입원이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 제구실을 못했다 해도 1992년 평화협정이후 다시 살아나고 있다. 산업분야, 특히 자원개발, 알루미늄 제련, 전기 공급 등의 분야는 성장하고 있다.
21세기 초 모잠비크는 괄목할만한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농업이 모잠비크 경제의 4/5를 차지하고 있지만, 모잠비크 내수생산물의 1/5밖에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농업생산물은 가족농 형태이기 때문이다. 두 가지의 중요 농작물, 옥수수와 카사바는 1997년에 이르러 자급자족이 되었고, 콩, 쌀, 다양한 채소와 땅콩, 참깨, 해바라기 등도 충분히 생산되고 있다. 각 농가는 캐슈넛(cashew nut)과 목화 등을 생산해 수출까지 하고 있다. 설탕, 차, 코프라(copra), 사이잘(sisal) 등은 사유재배지, 국유재배지, 정부지원 회사 등에 의해 식민지 시절부터 꾸준히 생산되고 있다. 가금류의 생산이 소고기나 돼지고기의 생산을 넘어서기도 했다. 이외에도 벌목과 어업이 꾸준히 성장하고 있는 추세이다.

2) 공산품
모잠비크의 제조업 기술이 식민지 시대 말기의 수준을 벗어나기 못하고 있다 해도 산업생산은 1980년대 초까지 꾸준히 성장해 왔다. 그러다 1990년에 이르러 산업생산은 거의 2/3 수준까지 현저히 저하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산업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시멘트 산업을 제외한 나머지 산업들은 성장하고 있다. 암모니아 공장이 1990년대 후반에 생기면서 자동차 공장도 2000년에 문을 열기도 했다. 모잠비크 경제성장의 문을 연 것은 2000년에 마푸토에 생긴 알루미늄 제련 공장이었다. 이것은 세계의 가장 큰 알루미늄 제련 공장들 중에 하나이고 모잠비크 수출의 중요한 몫을 차지하게 되었다. 1인당 GDP는 2008년 기준으로 $900이다.

3) 교통, 통신
모잠비크의 교통 분야는 이웃나라와의 관계 발전의 역사를 반영한다. 국도, 철도, 항만 분야는 각 주(州)에 의해 개발되었고, 남아공, 짐바브웨, 말라위 등의 이웃 나라들이 자기들의 필요에 의해 제공하기도 했다. 그래서 모잠비크 서부의 해안가와 동부 내륙을 잇는 철도와 도로 시스템은 잘 발달되어 있다. 마푸토에 있는 항만과 철도 복합 시스템은 19세기 말, 금과 석탄 채굴을 위해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와 북동쪽 남아공 회사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베이라(Beira)는 짐바브웨까지 이르는 도로와 철도를 갖고 있고, 나칼라(Nacala)는 모잠비크에서 최신시설을 갖춘 가장 좋은 천연항을 가지고 있다.
항공사로는 모잠비크 에어라인인 LAM(Linhas Aereas de Mocambique)이 있고 이것은 국내선과 국제선을 취항하고 있다. 전화시설의 설치는 앞으로 오랜 기간을 기다려야 하지만, 휴대폰 사용은 21세기 초가 되면서 빠르게 보급되고 있다. 그러나 인터넷은 그 인프라 시설의 미비로 제한적이며 서서히 성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