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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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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필리핀 천주교회의 선교역사

필리핀의 가톨릭 신앙은 1519년 스페인의 지원을 받은 마젤란(Ferdinand Magellan) 원정대가 필리핀 레이테섬(Is. Layte)을 발견하면서 시작된 이래, 333년간의 스페인 식민지하에 교세는 크게 성장하였다. 1898년부터 1946년까지 미국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미국으로부터 개신교가 전파되었지만 그 힘은 크지 않았다. 그리고 1942-1945년 혹독한 일본 침략기를 거치지만 뿌리 깊은 신앙을 흔들어 놓을 수는 없었다. 현재 필리핀의 가톨릭 교세는 인구의 80.9%로 추정하고 있고, 필리핀 교회는 마닐라 대교구를 중심으로 16개의 대교구와 56개의 교구, 6개의 대목구, 7개의 성직,수도 자치구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외방선교회가 파견되어 있는 바기오 교구는 루손섬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험난한 산악지역이란 특성상 스페인 정복자들의 접근이 쉽지 않았다. 그러한 이유로 가톨릭 신앙은 다른 지역에 비해 늦은 1907년에 벨기에의 선교사들에 의해서 전파되었다. 바기오 교구의 인구는 674,459명이고, 그중 가톨릭 신자는 481,705명으로 65%를 차지한다.

교구 내 본당은 26곳(Baguio City 8, Benguet Province 18)이고, 사제의 수는 교구에 적을 둔 사제는 41명이며, 선교회와 수도회 사제는 13명(필리핀인 4, 외국인 9)이 있다. 교구 내 여성 수도자들은 51명(필리핀인 39, 외국인 12)이 활동을 하고 있다. 교구 내에는 연합신학교(Pre-college와 Philosophy)가 있으며, 신학생의 수는 57명(Pre-college 18, Philosophy 23, 관구신학교에 Theology 16)이다. 그 밖에 교구와 CICM(Congregation of the Immaculate Heart of Mary)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대학교(1), 고등학교(13), 초등학교(4) 및 유치원(6)이 있고 병원(2)과 보건소(1)를 운영하고 있다.


2. 선교지의 이모저모

(1) 역사
마닐라를 수도(인구는 11,550,000명)로 하고 있는 필리핀의 육지 면적은 약 30만㎢이고, 남북으로 최장 길이는 약 1,850km이며, 동서로 가장 넓은 곳은 약 1,125km이다. 태평양에 둘러싸여 있으며, 동쪽은 필리핀 해, 남쪽은 셀레베스 해, 남서쪽은 술루 해, 서쪽은 남중국해와 접한다. 2개의 주요 섬은 북부에 있는 면적 10만 4,688㎢의 루손 섬과 남부에 있는 면적 9만 4,630㎢의 민다나오 섬이다. 필리핀 중부의 비사얀 제도는 파나이· 네그로스· 세부· 레이테· 사마르 섬으로 구성되며, 민도로 섬은 루손 섬 바로 남쪽에 있고, 팔라완 섬은 서부에 외따로 떨어져 있다. 이러한 필리핀의 역사는 네 단계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다. 즉, 1521년 전까지의 스페인식민지 이전시대, 1521-1898년까지의 스페인 식민지 시대, 1898-1946년까지의 미국 식민지 시대, 1946년 이후 현재까지의 독립 이후의 시대이다.

1) 스페인 식민지 이전 시대
필리핀에 살았던 첫 번째 사람들인 니그리토(Negrito; 작은 흑인, 필리핀, 말레이 안다만에 산다)들은 3만 년 전 당시는 대륙과 연결되어 있었다고 추정되는 보르네오와 수마트라 등에서 육지를 통해 이주해 온 것으로 추측된다. 그 뒤 말레이(Malay)인들이 초기에는 육지를 통하여 그리고 이후에는 바다를 통해 배를 타고 북쪽에서부터 이주해 왔다고 생각된다. 이주해 온 말레이인들은 다투스(datus)라고 알려진 지도자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자신들이 이주해 오면서 이용했던 아웃트리거(outtrigger)형태의 배를 의미하는 바란가이(Barangays)라고 부르던 여러 공동체 속으로 정착했다. 9세기 경에 중국 상인들과 무역상들이 도착하였고 그곳에 정착했다. 가끔은 아랍의 무역선들이 들어왔고, 특히 북쪽지역에 이슬람을 소개하였으며 이 영향이 루손(Luzon) 지역에 영향을 끼쳤다. 말레이인들은 스페인이 도착하기 전인 16세기까지 주축을 이루는 인종으로 남아있었다.

2) 스페인 식민지 시대
1521년 포르투갈의 탐험가 페르디난도 마젤란(Ferdinando Magellan)은 필리핀에 다다랐고, 군도(群島)에 상륙하였지만 단지 몇 칠만 그곳에 머무른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그리스도교는 잇따른 스페인 원정대와 스페인 예수회의 도착 이후 곧 전교되기 시작했고, 17세기와 18세기에 이르러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하여 자리를 잡았다. 1810년 멕시코가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할 때까지 필리핀 군도는 북아메리카 스페인 정부의 통치 아래 있었고, 북아메리카와 필리핀 사이에 주목할 만한 민족이동이 있었다. 이 기간이 로만가톨릭으로의 개종 시대였다. 스페인 식민지의 사회체계는 마닐라에 중심을 둔 지방정부에 의해서, 그리고 가톨릭교회 성직자들의 영향 아래 발전하였다. 스페인의 영항은 루손(Luson)지역과 중앙 필리핀 지역에 가장 강하게 미쳤으나, 그와는 다르게 민다나오(Mindanao)와 특정 해안 도시들은 스페인의 영향이 적었다. 장기간의 스페인 통치 중에는 많은 반란들이 있었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면서 유럽에서 교육을 받은 필리핀인(人) 혹은 중국계 필리핀인(人)인 소위 국민의 영웅 호세 리잘(Jose Rizal) 등은 스페인 통치의 난폭성을 비판하기 시작하였고, 국민들에게 국가적 정체성의 새로운 사상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스페인에 대항하는 마지막 봉기(蜂起)에 대한 영감을 준 이러한 운동은 1896년 또 다른 중국계 필리핀인인 에밀리오 아귀날도(Emilio Aguinaldo)의 지도력 아래 시작되었고, 이 운동은 스페인-아메리카 전쟁 동안 1898년 5월 1일 마닐라만에서 아메리카가 스페인 함대를 격퇴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1898년 6월 12일 아귀날도는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했다.

3) 미국 식민지 시대
마닐라만에서 조지 드웨이(George Dewey) 제독의 스페인 함대를 물리친 이후, 미국이 필리핀을 점령했다. 스페인은 전쟁이 끝난 후 1898년 12월 10일 파리 조약의 협정에 의해 미국에게 필리핀 군도를 이양했다. 혁명적인 아귀날도 장군에 의해 이끌어지는 미국의 식민통치에 대항하는 전쟁이 1899년에 시작되었다. 이 투쟁은 수 만명의 필리핀인들과 수 천명의 미국인들의 생명을 요구했었다. 1901년 아귀날도는 체포되었고, 미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 후, 1902년 7월 4일 평화협정으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점차로 민중들의 저항은 쇠퇴하였었다. 그러나 1913년 까지 무장 저항는 산발적으로 계속되었는데, 특히 민다나오(Mindanao)와 술루(Sulu)에서는 양측 모두 많은 사상자들이 속출하였다. 필리핀의 미국 식민정부는 항상 식민통치가 임시적이라는 것과 사회제도의 발전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라는 것을 선포하였었고 결국에는 자유와 민주정부의 설립을 위해서 노력한다는 것을 주장하였었다. 1907년 최초로 선거에 의해 입법기관이 구성되었고, 많은 필리핀인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상하양원의 입법부가 구성되었다. 행정부처도 구성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는 점차적으로 효과적인 통치능력을 가진 필리핀인들에게로 행정권이 이양되어 갔다. 가톨릭 교회도 재정리되었는데, 상당한 양의 교회부지가 매각되었고 재분배되었다.
1935년 티딩-맥듀피(Tydings-McDuffie)결의서를 통하여 필리핀은 자체정부를 가진 자치주(commonwealth)가 되었다. 마누엘 퀘전(Manuel Quezon) 향후 10년 동안 필리핀의 독립을 준비하기 위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1942년 5월 필리핀에 있던 미군의 마지막 거점인 코레기도(Corregidor)가 일본에 넘어갔고, 필리핀 군도는 일본의 점령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일본 점령기 동안 수천 명의 필리핀인들은 일본군에 대항하여 국지전을 벌렸다.
1944년 10월 20일 레이트(Leyte)에 맥아더 장군이 도착하면서 일본과의 전면전(the full-scale war)을 통하여 필리핀 군도를 재탈환하기 시작하였다. 1945년 9월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필리핀인들과 미국인들은 함께 싸웠다. 마닐라의 대부분이 전쟁의 후반기 몇 달 동안 파괴되었고, 이러한 전투로 말미암아 마닐라는 제2차 세계대전 후의 폴란드의 바르샤바 다음으로 가장 황폐화된 도시가 되었다. 약 백만 명의 필리핀인들이 전쟁 중에 목숨을 잃었다.
일본의 점령으로 인하여 해방을 위한 전투인 국지전이 지속되었고, 필리핀은 큰 손실과 함께 철저히 조직화된 파괴로 인하여 고통을 받았다. 필리핀의 불안정함에도 불구하고 필리핀과 미국은 독립을 위한 계획을 추진하기로 결정하였고, 1946년 7월 4일 필리핀 군도는 티딩-맥듀피 결의서에 따라 필리핀 군도는 필리핀 공화국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1962년에 이르러 필리핀의 공식적인 독립일은 1898년 에밀리오 아귀날도에 의해 선포되었던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일을 기념하고 전승하기 위하여 7월 4일에서 6월 12일로 바뀌었다.

4) 독립 이후 시기
1946년 7월 4일 미국 정부를 본뜬 정부를 세우고 필리핀 공화국 수립을 선포했고 초대 대통령으로는 마누엘 로하스가 선출되었다. 독립 초기 필리핀은 미국의 전후복구원조에 의해 좌우되었다. 래몬 막사이사이(Ramon Magsaysay)대통령의 지도력 아래 공산주의에 대한 성공적인 진압이 이루어질 때까지 공산주의 성향인 후크레벨리온(Huk Rebellion:1945년-1953년)에 의해 전후회복의 노력이 어렵게 되기도 했었다. 이어진 카르로스 가르시아(Carlos P. Garcia:1957-61) 대통령과 디오스다도 마카파갈(Diosdado Macapagal:1961-65)대통령들에 의해 아시아의 주변 국가들과의 연대를 확장하며, 국내 재건을 위한 계획을 수행하였고, 경제를 다양화하고 발전시키려는 노력들이 있었다.

1965년 페르디난드 E. 마르코스가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1969년에는 최초로 필리핀의 재선 대통령이 되었다. 1972년 마르코스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속 집권했으며, 계엄령을 공식 해제한 1981년부터는 대통령령으로 통치했다. 1983년 야당 지도자 베니그노 S. 아키노 2세가 귀국길에 마닐라 공항에서 피살되자 마르코스 정권에 대항해 온 반(反)정부 세력의 저항이 더욱 격렬해졌다. 이런 난국을 모면하려고 1986년 2월 앞당겨 실시한 대통령 선거에서 마르코스는 야당 후보이자 베니그노의 미망인인 코라손 아키노를 누르고 공식 승자로 선포되었지만 마르코스의 명백한 부정선거는 폭동을 야기시켰고, 이 폭동으로 그는 권좌에서 물러났다.
마르코스 축출 직후인 1986년 2월 25일 코라손 아키노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러나 아키노 정부는 출범 당시의 기대만큼 정국안정과 개혁에 성공하지 못했다. 마르코스의 부인인 이멜다가 1991년 말 6년간의 망명생활 끝에 귀국하여 대통령선거 출마를 선언하기도 했으나 마르코스 정부 전복에 견인차 역할을 했던 피델 라모스 국방장관(前 군참모총장서리)이 아키노의 지지에 힘입어 ‘국민적 화해’를 강조하면서 1992년 5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후 필리핀은 민주주의를 지켜나가고 있다고 하겠다.


(2) 자연환경

1) 지형
비교적 큰 섬들 대부분 휴화산과 산맥들이 두드러진 특징을 이루는 가운데 전반적으로 다양한 지형 분포를 보인다. 대부분의 섬에서 군데군데 중단되는 좁은 해안평야와 대체로 북쪽으로 흐르는 강들을 볼 수 있다. 바이 호를 제외하고는 루손 섬 및 민다나오 섬의 큰 호수들은 모두 화산활동으로 생겨난 것이다. 라구나데바이 호는 면적 922㎢인 필리핀 최대의 호수로서 마닐라 남동쪽에 있으며, 한때 마닐라 만의 한쪽 부분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루손 섬 북부에는 동쪽은 시에라마드레 산맥과 연결되고 서쪽은 센트랄 산맥과 이어지는 울퉁불퉁한 산맥이 남북으로 뻗어 있으며, 그 가운데 비옥한 카가얀 강 유역이 펼쳐져 있다. 루손 섬 중부에서 이들 산계(山系)가 합쳐지는 지점을 중심으로 카가얀 강 하곡과 그 이남에 있는 면적 1만 9,200㎢의 비옥하고 인구가 조밀한 중앙평원지역으로 나뉜다.
마닐라 시는 이 평야 남단 마닐라 만에 형성된 천연항에 있다. 루손 섬 남동부에 있는 나선형 반도는 고립된 화산들과 불규칙한 산괴 및 구릉들로 이루어져 있다. 울퉁불퉁한 민다나오 섬은 5개의 주요산계와 크고 작은 많은 만과 반도로 대단히 긴 해안선을 형성하고 있는 복잡한 지세이다. 필리핀 최고봉인 해발 2,954m의 아포 산에서는 민다나오 섬 제1의 도시인 다바오(인구 1,360,000명)가 내려다보인다.

2) 기후
필리핀은 주로 해발고도에 따라 기온이 다른 해양성 열대기후를 나타내며, 태풍권에 걸터 앉아있다. 마닐라의 연평균기온은 27℃이다. 서부는 뚜렷한 건기를 보이지만 열도 전체는 대체로 강수량이 충분하며, 태풍이 빈번하게 북부 동해안을 강타한다. 전 국토의 1/3 이상이 숲으로 덮여 있으며, 소나무를 포함한 연질 목재들뿐만 아니라 나왕(필리핀산 마호가니)과 같은 값진 경재들도 많다. 필리핀 원산 동식물로는 800여 종의 난초와 56종 이상의 박쥐를 꼽을 수 있다. 광물자원이 풍부하며, 금·은·철광석·구리·납·크롬철광·니켈·망간·석회암의 매장량은 상당하다. 매장량이 얼마 안 되는 석유매장지들이 팔라완 섬 근해에 모여 있다.


(3) 국민

1) 인구
필리핀의 총인구는 2009년 현재 92,200,000명으로 필리피노(Filipino)로 불리는 대다수 주민들은 주로 중국인과 혼혈이거나 미국인 또는 스페인계와 혼혈인 말레이 인종이다. 현재 가장 많은 인종은 그들의 조상이 처음 필리핀에 도착한 이후로부터 오랫동안 상업 부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중국계이다. 아랍인들과 인도인들도 11세기와 12세기 초부터 필리핀을 상대로 여행과 무역을 했기 때문에 그들의 후손들도 있다. 서로 다른 종족 사이의 결혼으로 인하여 많은 필리핀인들은 인도, 아랍, 미국, 스페인 그리고 중국인들을 조상으로 가진 사람들이다. 중국계 필리핀인들 다음으로는 미국계와 스페인계 사람들이 많다. 그 외에 민다나오 벽지의 숲속에 살고 있는 소수 종족이 있다. 인구밀도는 비교적 높은 편이고 인구의 35.9%가 15세 미만이다.
1970년대부터 시행된 가족계획사업은 특히 시골지역을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다. 평균수명은 2005년 현재 남자가 67.8세, 여자가 72.5세이다. 2008년 현재 36,810,000명가량이 유효 노동인구이며 이 가운데 51%가 공무원을 포함한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34%는 농업, 15%는 공업에 종사하고 있다.

2) 언어
공식 언어는 타갈로그어(전체인구의 1/3이 마닐라 일대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기초로 한 필리핀어와 영어이다. 그밖에 전체인구의 약 1/4이 사용하는 세부아노어를 비롯해서 일로카이노어·힐리가이노어·비콜어 등 수십 종의 다른 언어들이 쓰인다. 그 밖에 대부분이 말레이-폴리네시안어의 언어군인 약 87종의 언어들과 방언들이 있다. 특히 네 가지의 주요 토착어로는 비사야스(Visayas)에서 사용되는 세부어(Cebuano), 마닐라 근교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타갈로그(Tagalog)어, 루손 북쪽에서 사용되는 일로카노(Ilocano)어, 민다나오에서 사용되는 마라나오(Maranao)어와 관련된 언어 등이 있다. 1939년 이래, 국가적 일치를 도모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정부에서는 타갈로그어에 기초를 둔 필리피노(Pilipino)를 국가 통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필리피노는 모든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으며 전체 필리핀 군도에 넓게 퍼져서 사용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영어, 푸키니즈(Fukienese), 북경어(Mandarin)을 제 2의 언어로 사용하고 있다. 거의 모든 교수들이나 학자들 그리고 공무원들이 영어를 사용하고 있고, 2003년 1월 당시 대통령이었던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Gloria Macapagai-Arroyo)는 교육부에 영어를 모든 학교와 대학에서 지식의 전달체로서의 영어를 부활시키라고 지시하였다. 또한 아주 소수의 필리핀 가족들이 스페인어를 제2의 언어로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교육은 6년의 의무교육을 시행하고 있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6년간의 무료이면서도 의무교육을 시행하고, 초등과정(Primary)을 마친 이후의 중등과정(Secondary) 4년간의 교육은 무료이지만 의무교육은 아니다. 2008년 통계에 의하면 해당 교육연령의 85%가 초등과정에 있고, 62% 정도가 중등과정에 있다. 필리핀은 개발도상국 가운데에서 가장 낮은 문맹률을 가진 나라 가운데 하나인데, 2003년 통계에 10세 이상의 국민들 가운데 93.4%가 읽거나 쓸 수 있는 능력이 있다.

3) 도시
수도인 마닐라의 인구는 11,550,000명이고 그 외에 주요 도시는 1,360,000명의 인구를 가진 다바오(Davao)시와 800,000의 인구를 가진 세부(Cebu)가 있다. 농촌에서 도시로의 대규모 이동은 특히 대도시 마닐라에 심각한 과밀현상을 초래했다. 전체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에 살고 있으며, 해외로 나가는 수많은 이민 가운데는 고도로 숙련된 인력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이민 가는 사람과 이주해오는 사람들은 대체로 서로 간에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4) 사회 경제

1) 경제
2008년 통계로 GDP는 천육백팔십육억 달러($168,6 billion)이며 1인당 GDP는 1,864달러이다. 구리, 니켈, 철, 코발트, 은, 금과 같은 천연자원을 가지고 있으며, 쌀, 코코넛 생산물, 설탕, 옥수수, 돼지고기, 바나나, 파인애플 생산물, 망고, 계란, 수생작물 등의 농산물을 생산하고 있다. 공업으로는 텍스타일, 의류, 제약품, 화학제품, 목제관련 제품, 식품류, 전기와 반도체 조립제품, 정유, 어류제품, 사업 외주서비스업(Business process outsourcing services) 등이다.

필리핀 경제는 주로 농업·경공업·서비스업에 기반을 두고 있다. 20세기말에 이르러 정부의 간섭이 늘어나긴 했지만 시장경제가 지배적이다. 물가는 구매력보다 더 빨리 상승된 반면 임금은 동아시아에서 최저 수준이다. 실성장률이 마이너스 상태인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다른 개발도상국들과 비슷하다. 총노동력의 2/5 이상이 종사하는 농업은 국내총생산(GDP)의 1/4을 차지한다. 농민의 다수가 소작농이며 국토의 1/4 이상이 경작에 적합하나 관개시설이 부족하다. 정부와 여러 국제기구들이 관개농지를 넓히려는 여러 사업을 후원하고 있지만 농업의 자급자족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쌀이 주요 농산물이며, 몇몇 섬에서는 옥수수 재배가 주종을 이루기
도 한다. 쌀의 경우 다양한 개량종들이 선을 보였고 다량의 비료가 현재 사용되고 있지만 산출량은 크게 늘지 않고 있다. 굴지의 코코넛 생산국으로 코코넛열매와 코프라뿐 아니라 코코스야자유를 주로 수출한다. 사탕수수·바나나·파인애플 등도 널리 재배되며, 외화 수입원으로서 종래의 마닐라삼과 담배를 대신한다.
만연된 불법 벌목행위와 아직도 존속하고 있는 이동농경방식 때문에 필리핀의 삼림은 계속 고갈되고 있다. 질 좋은 목재와 베니어판이 일본·영국·미국 등지에 대량으로 수출된다.
광업은 GDP에서 적은 비율을 차지하지만, 구리·금·철광석 등은 외화 수입원으로 적지 않은 몫을 한다. 제조업은 GDP의 1/4을 차지하며 총노동력의 1/10을 고용한다. 주요 제조업으로는 식품가공, 음료·석유제품·섬유·신발 등의 생산이 손꼽힌다. 정부는 전기 및 전자 기기 조립업을 포함한 노동집약형 산업의 육성에 적극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
도로는 1/7 정도만 포장되어 있으며, 마닐라와 막탄 섬의 세부(Cebu) 근교에 국제공항이 있다. 필리핀 제1의 항구는 마닐라에 있다. 그러나 수송의 하부구조가 빈약하여 늘어나는 농산물량을 처리하는 데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있다. 전기 및 전자 제품과 부품, 코코넛 제품, 의류, 과일과 야채, 설탕과 설탕제품 등을 수출하며, 광물연료·자본재·곡물·화학제품 등은 수입한다. 무역수지는 종종 역조현상을 보인다. 주요 무역 상대국은 미국과 일본이고 해외 근로자들이 보내는 송금이 중요한 외화 수입원이다. 정부의 예산 지출은 전통적으로 수입을 초과해왔지만 1994년을 넘어서며 흑자로 돌아섰는데 외채는 1980년 이후 갑자기 늘어났다.

2) 종교
거의 400년의 스페인과 미국의 식민지 통치의 영향으로 인구의 90% 이상이 그리스도교인들이다. 스페인 계통이 아닌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슬람교인들이다. 술루(Sulu) 군도와 민다나오의 중앙과 서부, 그리고 루손(Luson) 북쪽의 산악 토착민들이 대부분 이슬람교를 믿고 있다. 그 외에 가톨릭계의 필리핀 독립교회파(아글리파이파) 신교도 약간 있으며, 그밖에 개신교 주요 종파도 있다.